[하루(hearthm)의 두번째완결작 STRANGER 시즌2 의 텍스트 파일입니다.]
* [다각/조직] STRANGER 시즌2는 [공커] 이며 STRANGER 시즌1의 후속작입니다.
* 번외2+프롤+9화완결. 총 12부의 내용이 담겨져있습니다.
* 인물소개 /cafe.daum.net/B2Sfic/am2a/1986 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 현재 배포되어있는 STRANGER 의 작가 hearthm 과 하루는 동일인물이며 이미 배포되어있는 시즌1 텍스트 파일에 시즌2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향후 배포시 시즌2를 언급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소장용 파일이나 자유롭게 재배포가 가능하며 배포시 작가와 출처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 본 텍스트 파일의 도용,수정,성형을 금하며 문제시 작가에게 메일부탁드리겠습니다. (writerhm@naver.com )
* 출저 : 비스트(BEAST)팬픽카페 - http://cafe.daum.net/B2Sfic
* 연재기간 : 2011.02.06 ~ 2011.03.18 까지 팬픽연재2번방에서 연재.
* STRANGER 시즌1을 읽지않으신분은 내용이해가 다소 어려울수있으니 시즌1을 읽으시길권해드립니다.
결코 같은 곳에 설수없는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그들의 두번째 이야기. [ STRANGER 시즌2 ]
W. 하루 (hearthm)
:) STRANGER 번외 세번째 이야기 [ 그 사람의 기억을 훔쳐주세요. ]
킬러조직 CREVASS 가 부업으로 운영하는 크레파스 흥신소가 개업을 한지 이틀째되는 날이였다. 총감독관인 두준과 크레파스 흥신소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요섭은 꽤나 기대하는 모양이였지만 조직원들은 모두 혀를 내두르며 곧 문을닫게될것이라 단언했다. 하릴없이 의자에 앉아 신경질적으로 물풍선을 날려대며 무료함을 달래기위한 크레이지 아케이드를 하고있는 현승역시 조직원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않았다. 무엇보다 본인은 현재 CREVASS 소속의 요원도 아니지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원 장현승이라는 토나오게 오글거리는 이름표를 달고 따분한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단 하나. 오늘로써 태어난지 90일된 '준' 이라는 이름의 처치곤란한 아기때문이였다.
"....씨발..뭐야이건."
장현승 뇌구조에 서비스정신 뭐 이런건 탑재되어있지않다해도 기본적으로 사회를 살아가는 상식같은건 탑재되어있기에 설마 고객에게 이런 말을 내뱉으리라고는 예상치못했는지 자신의 입밖으로 나온말에 현승도 꽤나 놀란 눈치였다. 물론 뽀로로탈을 뒤집어 쓰고 상담원 장현승의 맞은편에 앉은 첫번째 고객님 역시 예상은했으나 내심 놀란 눈치였다. 이미 입밖으로 나온 말을 주워담을수도 없으니 현승은 두어번 헛기침을 하다 최대한 상냥한 얼굴로 '인형탈이 참..귀...귀..귀엽네요' 라고 했고 그 모습에 쑥쓰러운지 뽀로로옷을 입은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정체불명의 뽀로로님였다.
"신변보호는 확실하게 해드리니 안심하고 탈은 벗으시죠?"
목에 핏대세우며 고객이 왕이라며 서비스정신을 강조하던 두준이 생각나 결코 절대 장현승에 입에는 담기지않을거같았던 귀엽다는 말도 내뱉었지만 이대로 계속 뽀로로와 이야기를 나눌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현승은 혹시나 고객이 신변노출을 두려워해서인가 싶어 안심하라는 눈빛으로 탈을 벗으라고 권했지만 도도한 뽀로로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두어번 내저을뿐 아무런 말도 하지않았다.
...씨발.
"좋은말로 할때 탈 벗으시죠? 너님이 진짜 뽀로로는 아니잖아요?!"
육두문자가 목끝까지 올라왔지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참자 마음먹은 현승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살벌한 어조로 말했다. 사람죽이는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현승에게 뽀로로하나 죽이는것쯤 일도아니니 제발 상황파악좀하길 바라는 현승의 마음이 전해진건지 뽀로로님이 들고있던 스케치북을 현승이 잘 볼수있도록 책상위에 올려놓은뒤 조심스럽게 한장을 넘겼다.
[ 그 사람의 기억을 훔쳐주세요. ]
젠장, 팔자 더럽게 꼬이는구나. 이번해가 삼재였던가?..
최고의 전략가 장현승이 어디서 튀어나온지도 모르는 약간의 정신적질환이 의심되는 뽀로로를 고객이라고 앉혀놓고 존댓말까지 써가면서 의뢰한번 받아보겠다고 죽을똥살똥 노력하고있는지금 이 순간이 문득 씁쓸하게 느껴지는 현승이였다. 가뜩이나 먹고싸고우는거밖에 못하는 준이때문에 골치아파죽겠는데 ..기억을 훔쳐? 장난하나진짜. 너무도 어이없는 의뢰에 현승의 머릿속에 먹고살기위해 이렇게 까지해야하나 싶은 생각이 스쳐지나가며 괜시리 울적해지는 기분이들었다. 더이상 대꾸할 힘도남아있지않아 현승이 진심으로 무당집이라도 찾아가 부적하나써야겠다는 생각을하는데 첫 의뢰인이자 파악할수없는 정체불명의 뽀로로님이 스케치북의 두번째장을 넘기고있었다.
*
하루종일 동운의 주위를 멤돌며 놀아달라고 칭얼댔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바쁜 동운때문에 조르는것도 지친 기광이 금방이라도 울것같은 얼굴로 쭈그려앉아 있는데 바닥에 어디선가 본듯한 책이 놓여져있었다. 요즘들어 기광이 훈련을 마치고 돌아올때면 흔들의자에 앉아 귀에 이어폰을 꽃은체 책을 읽고있는 동운의 모습을 자주 볼수있었는데 문득 그 모습이 떠올라 기광은 책을 집어들었다. 표지가 너무도 익숙한걸 보니 아마도 그때마다 동운이 읽고있었던 책인듯 싶었다. 무슨 내용일까 싶어 조심스럽게 한 페이지를 넘기는데 그림이 잔뜩 그려져있거나 사진이 잔뜩 찍혀있지않은이상 책과는 거리가 먼 기광이 결국 한페이지를 넘기지못하고 지루함에 책을 덮으려던찰나였다. 형광펜으로 그어놓은 문구가 기광의 눈에 들어왔다.
'타클라마킨'
형광펜으로 그어놓은걸보면 의미있는말인거같은데..무슨뜻일까. 복수에 눈이 멀어 눈앞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해주는 사람도 알아보지못한체 살아갔던때엔 몰랐는데 요즘들어 기광은 손동운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가 무척이나 궁금했었다. 무엇이 들어있길래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자신을 마치 아무일도없었다는듯 사랑해줄수있는건지, 어째서 아무것도 묻지않는건지‥. 기광은 형광펜으로 밑줄까지 그어놓은 이 문구가 가진뜻이 궁금해 다음구절을 읽어보려다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난듯 입꼬리를 살짝올려 웃음지은뒤 책을 덮었다. 놀아달라는 자신을 뿌리치고 신상폭탄을 제조한다면서 잔뜩 바쁜척하는 동운에게 달려갈 아주 좋은 구실이였다. 문구의 뜻을 알려줄 다음구절보다 더 정확하고 무엇보다 보고싶기까지한 그 사람의 머릿속에 답이있을텐데 호기심을 해결하기에 그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기광은 신이난 얼굴로 요거트맛의 커다란 막대사탕을 하나 집어들고 동운이 있을 연구실로 향했다.
"그러니까 이게 뜻이 모야?!! 웅웅?!!!"
하얀가운을 입은체 연구실에서 무엇인가에 몰두해있는 동운의 모습은 기광에겐 너무도 낯선모습이였다. 손동운의 모든것이 이기광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오만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걸까. 그래서였다. 자신이 아닌 다른것에 몰두해있는 동운의 모습에 질투가 나서 혹시 그 이유가 아버지의 죽음때문은 아닐까 초조하고 불안해서 기광은 훈련도 가지않은체 하루종일 동운의 주위를 멤돌며 칭얼대고있었다.
그럴수있을리가없는데 그래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손동운의 모든것이 이기광만을 위해 존재하기를, 이기광의 손짓하나에 말한마디에 표정하나에 천국과 지옥을 오고갔던 손동운이 제발 이기광의 곁을 떠나지않기를‥. 내색하지않았지만 기광은 그날 이후 마음한구석이 불안해서 미칠것만같았다. 혹시라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이기광을 용서할수가없어서 손동운이 이기광의 곁을 떠나게될까봐 기광은 동운이 내뱉는 말 한마디 표정하나에 자꾸만 조바심이 났었다.
"아기광. 집에서 얌전히기다리라고했잖아, 여기오면안된다고했어,안했어?! 착한어린이는 말도 잘듣는다는데 우리 아가는 왜이럴까?"
"안아주지도않고 뽀뽀해주지도않고 쓰다듬어주지도않고 재워주지도않고..훌쩍...근데 오지도 못하게 하고..나 울거야!!! 손동운 바보!! 미워미워!! 으아아아앙..."
연구실로 찾아와 보호장비도 착용하지않은체 자신의 옆에 달라붙어 징징거리는 기광이 신경쓰여 결국 동운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단호한 표정으로 기광을 바라보았다. 심심해할까봐 어린이들의 천국 투니버스 tv도 틀어주었고 혹시나싶어 노트북에 어린이 영화도 몇편 받아두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칭얼대는 기광때문에 동운은 이해할수가없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동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광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는 금방이라도 울 태세로 연구실 바닥에 주저앉아 땡깡을 부리고있었다. 그동안 기광을 돌보느라 조직의 일에 신경을 쓸겨를이 없었던 동운이였다. 때문에 오늘만큼은 상부의 명령에따라 새로운 폭탄제조를 하기위해 연구에 몰두하고있었다. 그렇다고해서 기광이 신경쓰이지않을리가없다는것을 기광은 왜 모르는걸까. 혼자있다 사고는 치지않을런지 넘어지진않을런지, 배는고프지않은지, 혹시나 자신을 보고싶어하지는않는지,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동운의 머릿속을 헤집고다니던 생각들이였다.
"...그거야 여기는 너무 위험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실로 데려오지못한건 위험하기때문이였다. 사람의 피부조직에 닿으면 피부를 타들어가게하는 화학물부터 흡입하는것만으로도 암을유발하는 바이러스들이 모여있는곳이 무기제조요원 손동운의 연구실이였다. 그러니 이렇게 보호장비하나없이 들어와 어린아이마냥 아무거나 만지작거리고 깨부술 아기광을 차마 데려올수는없었다. 휴우 , 동운은 깊게 숨을 내쉰뒤 서랍을 열어 호흡기를 꺼내어들고 빠르게 주저앉아있는 기광의 입에 부착시켰다. 그리곤 보호장비를 하나하나 찾아 기광에게 입히고 두 팔로 기광의 등을 감싸안아 일으켜세운뒤 사랑스러움과 걱정스러움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기광을 바라보았다.
"타클라마킨. 사막의 이름인데 한번 들어서면 영원히 돌아나올수없는 뜻을 가지고있대."
아무일도없었다는듯 정말 아무렇지않은듯 기광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예전처럼 행복만 가득한것은 아니였다. 죽은 아버지의 그림자가 마음을 짓누를때마다 동운은 기광을 바라보는것이 괴로웠다. 너무 아파서 고개를 돌리면 기광이 보이지않는 1분 1초가 기광을 향한 그리움으로 가득차서 미칠것만같았다. 보고있어도 아프고 보지않아도 아프다면 보는쪽을 택하겠다 결심했을때 동운의 눈에 이 문구가 눈에 들어왔었다. '타클라마킨' 한번 들어서면 영원히 돌아나올수없는 깊은 사막. 마치 기광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는것같아 동운은 몇번이고 그 뜻을 곱씹었었다.
"나에게는 이기광이 '타클라마킨' 이야. 한번 사랑하면 영원히 빠져나올수없으니까..."
죽은 아버지의 그림자는 아마도 영원히 기광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짓누를거고 그럴때마다 동운은 기광을 바라보는것이 심장이 부서지는것마냥 아플지도 모른다. 그렇다고해도 도망칠수는없을것이다. 손동운에게 이기광은 영원히 빠져나올수없는 깊은 사막처럼 돌이킬수없는 단 하나뿐인 사랑이니까. 아프면 아픈데로, 괴로우면 괴로운데로 사랑하자. 이기광이 손동운곁을 떠나지않는다면 언제까지나 이런 아픔쯤 이런 괴로움쯤 모두다 견딜수있으니까, 이대로 사랑하자 마음먹었었다.
"그러니까 손동운은 아기광한테 푹 빠져서 영원히 헤어나올수없는거야. 사랑해, 죽는 그 순간까지 사랑할게."
말을 마친 동운이 팔을 벌려 조심스레 기광을 자신의 품안에 가두었다. 쓰담쓰담 - 부드러운 손길이 기광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기광의 마음으로 따뜻한 바람이 세어들어와 봄날의 나른함같은 평온함이 기광을 휘감았다. 동운의 품은 솜털처럼 푹신하고 동운이 들려주는 고백은 케익보다 달콤해서 기광은 금방이라도 잠이들어버릴것같았다. 이게 꿈이라면 영원히 깨고싶지않을만큼 행복해서 기광은 두눈을 질끈감았다. 언제나 넘쳐흐를정도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동운의 마음이 기광의 심장에 닿아서 혹시라도 아버지의 죽음때문에 동운이 자신을 떠나진않을까 초조하고 불안했던 걱정이 녹아내리는것만같았다. 그 사랑이 믿어지지가않을만큼 고마워서 ‥.
그래서였다. 넘실대는 마음을 주체하지못하고 이기광에게 자신의 모든것을 주고있는 손동운을 위해 기광은 그럴수있는거라면 모든것을 되돌리고싶었다. 동운의 품에 안긴체 기광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만났던 그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바꿀수있는 기억이라면 모두 바꾸어주고싶었다. 그것이 복수에 눈이 멀어 외면해야만했던 순간들, 모른척해야만했던 자신을 향한 동운의 마음에 대한 보답이자 기광이 동운에게 해줄수있는 마지막 고백이니까.
*
1. 사랑의 시작은 혼자가 아니였다.
살인미수로 스스로 죄책감에 시달리고있던 동운이 조직에 들어온 첫날 기계의 부품들을 만지작거리며 무료함을 달래고있을때 훈련을 마친 기광이 그 옆을 지나가고있었다. '멋지다' 작은 부품들과 화학재료가 만나 폭발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흥미로워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지켜보고있던 기광이 내뱉은 말이였다. 부모님의 죽음으로인한 충격으로 감정기복이없던 기광이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말로 드러내는 순간이였다. 동운은 시선을 돌려 기광을 바라보았다. 작은 소년의 눈이 예쁘게 초승달을 그리며 해맑게 웃고있었다.
[ 멋지다! ]
눈이 마주치고 다시한번 기광이 감탄사를 내뱉었을때 창가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동운의 마음을 휘감았던걸까. 너무도 따뜻해서 동운은 그대로 주저앉아 엉엉 소리내어 울기시작했다. 기광이 내뱉은 한마디는 동운이 태어나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 따뜻한말이였다. 모두들 폭탄을 제조하는 동운에게 살인자라고했다. 사람을 해치는 나쁜일이라고 수근거리기 일쑤였던 이 일을 멋지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마법처럼 나타났다.
"그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있다면 딱 너처럼 생겼을거라고 생각했어. 우리 기광이는 진짜 천사인가봐 "
"사실은 그때 너무너무 두근거려써써 ! 뿅 하고 반해썽나봐 ~! 헤헤,, 울 동운이능 지금도 머싰지만 그때도 짱짱짱! 멋싰었어!!"
동운이 처음 만났던때를 회상하듯 추억에 잠긴 눈으로 기광을 바라보며 말했고 기다렸다는듯 기광이 동운의 입술에 쪽 하고 자신의 입술을 맞추곤 엄지 손가락 두개를 치켜세운뒤 크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로써 첫번째 기억을 되돌렸다. 손동운과 이기광의 처음이 손동운의 짝사랑이아니라 이기광 역시 손동운에게 반한거였다고 그러니 처음부터 함께 사랑해온거라고.
2. 기다림은 설레임이다.
"왜 기다리구있어.. 늦게 끝난다구 방에 있으랬잖아.. 춥지않았어?"
입김이 세어나오는 쌀쌀한 겨울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고있는 영화관 앞 기광이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맞으며 서있었다. 그 모습에 혹시 감기는 걸리지않았을까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동운이 기광에게로 달려오고있었다. 영화를 보기로 약속했지만 생각보다 업무가 길어졌고 때문에 방에서 기다리라는 연락을 기광에게 전했던 동운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이나 늦은 자신을 추운 겨울날 밖에서 기다리고있다니 동운은 이해할수없었지만 서둘러 자신이 목에 둘러있던 머플러를 풀어 꽁꽁 얼어붙은 기광의 목에 둘러주었다.
"어린왕자한테 사막여우가 그랬대. 네가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라고.."
"......?.."
"행복해지고싶어서 기다렸어. 설레이고싶어서.. 동운이는 무슨옷을 입고나올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지금 뭘하고있을까. 어디쯤왔을까. 도착하면 무슨말을할까 상상하면서..헤헤.. 너를 떠올리는 1분 1초가 너무너무 설레여서 지금 니가 눈 앞에 있는데두 너무 떨려 .."
상상조차 하지못했던 말들을 내뱉는 기광의 모습이 믿겨지지가않아 동운은 아무말도할수가 없었다. 아무말도하지못한체 그저 자신을 바라보는 동운의 손을 기광이 자신의 심장에 가져다대곤 ' 봐, 심장도 반가워서 콩닥콩닥 뛰잖아....헤헤....' 라며 웃음을 머금은 입술을 달싹였다. 콩닥콩닥 - 심장의 떨림이 동운의 손에 닿아 그대로 마음에 전달이되는것같아 동운의 심장도 빠르게 뛰기시작했다.
"이쁜짓했는데 쓰담쓰담 안해주꺼야?!!!!"
여전히 아무말도 못한체 서있는 동운에게 두 볼을 부풀리며 귀엽게 눈썹을 찌푸리는 기광이 뽀루퉁한 목소리로 내뱉었고 그제서야 이것이 현실이구나 싶은지 동운이 기광을 꼬옥 끌어안았다. 그저 자신의 옆에 있어주는것만으로도 이기광은 손동운에게 감동 그 자체이지만 지금 이 순간보다 더 벅찬 감동은 없었다. 순간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릴정도로 자신을 기다리는것이 설레이고 행복했다고 말하는 기광은 너무도 감동적이였다. 지금의 행복이 달아나지못하도록 동운은 기광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소복소복 하얀눈이 두 사람의 머리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더듬은 기억속엔 언제나 기광을 기다려주던 동운이 존재했다. 되돌리고 싶은 두번째 기억은 기다림이였다. 언제나 자신을 기다려주었던 동운을 위해 이번엔 기광 자신이 동운을 기다려주고싶었다. 손동운을 향한 기다림은 힘겨움이 아니라 설레임이라고 말해주고싶었다. 그러니 언제까지나 설레이고싶다고‥.
3. 뽀로로보다 뿡뿡이보다 네가 더 좋아.
저녁에 있을 작전을 위해 동운이 여느때처럼 달콤한 케익으로 낮잠에 빠진 기광을 깨워 부드럽게 등을 어루만져주었다. 토닥이는 동운의 손길이 마음에 들었는지 베시시 웃어보이며 케익을 얌냠 맛있게도 먹은 기광이 서둘러 나갈 준비를 마치곤 문을 나섰다. 오늘도 제발 무사히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배웅해주기위해 동운이 문을 나서는 기광에게 손을 흔드려던 순간이였다.
"뽀로로보다 뿡뿡이보다 동우니가 열배..아니 백배..아니아니, 이~따~만~큼 더 좋아!!"
가던길을 돌아와 눈앞에 있는 동운을 바라보며 기광이 손가락 열개를 모두 펼쳐 10개를 만들었다 만족스럽지않은지 손으로 커다랗게 원을 그려보이며 말했다. 그 모습에 갑자기 놀라 동운이 배웅하려던 손길을 멈추곤 멀뚱히 기광을 바라보는데 방긋방긋 해맑게 웃으며 이번엔 머리위로 커다랗게 하트를 그리는 기광이였다.
"사랑해. 쪽 -! "
하트만으론 모자랐는지 기광이 동운에게로 달려와 볼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대곤 금새 볼이 발그레해져선 '다녀오께요~!' 라고 외치면서 동운의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듣고싶어서 온갖 구실을 만들어댔던게 불과 얼마전 일이였는데 사랑한다니‥. 기대하지도않은 선물을 받은것처럼 기분이 너무 좋아서 동운은 기광이 사라진 자리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사랑해' 기광이 들려준말이 메아리처럼 귓가에 멤돌고 갑자기 입가로 주체할수없을만큼 웃음이 세어나왔다. 동운은 이제서야 실감이 날것만같았다. 차마 자신을 사랑해주리란 기대조차 못했었기에 자신의 귀를 의심한체 기광이 들려준말들을 믿을수가없었다. 몇일동안 기광이 보여주는 모든것들은 현실이라고는 도저히 믿을수없을만큼 꿈만같아서 마음껏 행복해할수도없었던 동운이였다.
'사랑해'
처음만났을때처럼 아직도 귓가에 메아리치는 기광의 속삭임은 마법같아서 동운은 세어나오는 웃음을 멈출수가없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사랑을 하고있는거였다. 지금 자신은 그토록 사랑하던 이기광의 사랑을 받고있는거였다. 그 사실이 심장이 터질만큼 기뻐서 동운은 한참동안이나 기광이 떠나간 빈자리를 바라보며 웃음지었다.
이것이 기광이 바꾸어주고싶었던 세번째 기억이였다. 좋아한다는말을 애써서 듣지않아도 괜찮다고, 기다리지않아도 애쓰지않아도 당연하게 세상 그 무엇보다 이기광은 손동운을 사랑하고있다고 그러니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사랑하고있는거라고 기광은 동운에게 말해주고싶었다.
*
무사히 목표물을 제거하고 돌아온 기광이 여전히 잠을 자지못하고 자신을 기다리고있는 동운을 침대위에 눕힌 후 오늘은 특별히 자신이 자장가를 불러주겠다며 목청껏 노래를 시작하고있었다. '잘자라 ~ 우리 아가 ~ ' 아가라는 말에 나이에 어울리지않게 노안인 동운은 살짝 뜨끔하긴했지만 맑고 달달한 아기광 목소리에 귀가 호강하는것같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토닥토닥 -
항상 동운이 기광에게 해주었던 토닥임을 기광이 동운에게 해주고있었다. 부드럽게 가슴을 쓸어내려주는 손길에 동운의 입가에 웃음이 지어지며 스르르 눈이감겼다. 조금씩 익숙해지고있었다. 자신을 향한 기광의 따스한 손길도 달콤한 고백도 사랑받는다고있다는 기분좋은 느낌도‥. 눈앞에 기적처럼 마법같은 일들이 펼쳐지고있었다. 자신을 기다려주는것도, 사랑한다는 속삼임도, 반했다는 달콤한 말들도, 따뜻한 손길도, 여전히 자신만을 위한 애교들도, 귀여운 표정도, 앙증맞은 입술도, 맑고 투명하게 빛나는 예쁜 두 눈도 처음 기광을 만났을때처럼 모든것이 마법같았다. 이것이 마법이라면 영원히 풀리지않기를‥.
감은 두 눈앞에 그동안 기광이 보여주었던 마법같은 나날들이 펼쳐지고있었다. 동운은 웃음이 담긴 평온한 얼굴을 하고선 천천히 잠이 들고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기광이 바라보며 작게 웃음지었다. 어딘지 슬퍼보이는 웃음이었지만 기광은 아직 해야할말이 남아있다는듯 잠이든 동운의 심장에 기대어 작게 읊조렸다.
"잘자고 사랑해, 달콤한 나의 기사님 - "
*
[ 모른척해줘. 부탁할게. ]
뽀로로님이 넘긴 마지막 스케치북에 쓰여져있던 말이였다. 현승은 아무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두번째장을 넘기면서부터 예상은 했었지만 뽀로로의 주인공은 공격수 이기광이였다. 복잡해보였던 의뢰는 간단했다. 손동운에게 있어 이기광이란 사람을 없애주는것 그것이 의뢰내용의 전부였다. 곧 잠에서 깨어날 동운이 기광을 찾으면 조직원들은 그저 그런 사람이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않았던것처럼 그 존재를 부인하면 되는거였다. 마치 모든것이 동운의 꿈이였다는듯 기억속에 존재하는 기광을 부정하는것 그래서 결국엔 동운 역시 그것이 꿈이였다 믿게만드는것 그것이 기광이 부탁한 의뢰의 전부였다.
'이제와서 왜 -' 라는 현승의 물음에 기광은 '동운이가 나를 용서한다고해도 내가 나를 용서할수가없어.' 라고 대답했다. 이해할듯 이해할수가없어 현승은 고개를 내저었지만 기광의 목소리가 너무도 간절해보여 부탁이라는 마지막 말에 더이상 아무것도 물어볼수가없었다. 끝내 복수를 택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끔찍한 기억을 만들어준것을 기광은 견딜수가없었던걸까.
기광이 뽀로로탈을 뒤집어쓰고 현승과 침묵속에 마주앉아있던 그 순간 깊은잠에서 깨어나듯 동운이 잠에서 깨어나고있었다. 꿈만같았던 마법이 풀리고 동운이 맞이하게될 현실은 어떤 모습일까. 이제 더이상 동운이 바라보는 그 어디에도 기광은 없겠지만 그것이 기광이 동운에게 줄수있는 마지막 선물이였다. 자신의 아버지를 버릴만큼 이기광을 사랑해주었던 손동운을 위해 기광이 줄수있는 마지막 선물은 기나긴 기억의 끝에서 사라져주는것,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그림자에 짓눌린 동운의 마음을 놓아주는것이였다. 손동운은 이기광을 절대로 놓을수없을테니까 처음부터 아무일도 일어나지않은것처럼 사라져줄게, 그러니 제발 자신을 잊고 편안해지기를‥.
현승은 기광이 떠나간 자리에서 머리가 아픈듯 미간을 찌푸리며 의뢰에 관련된 서식을 작성하고있었다. 크레파스 흥신소의 첫번째 의뢰이자 기광이 동운에게 남기고간 마지막선물인 의뢰명은 [ 그 사람의 기억을 훔쳐주세요 ] 였다.
:) STRANGER 시즌 2 _ 00 (Pro.)
"체크메이트. 내가 이겼으니 약속대로 오늘밤 그대는 나의 것인가?"
전승무패의 프로게이머 장현승이 작전을 위해 자존심 꾹꾹 누르고 일부로 져준것도 모르고 실력으로 이긴줄아는 사내가 얼굴가득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오늘밤 자신의 품에 안길 현승을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웩- 금방이라도 구토가 일어나 버터가 좔좔 흐르는 느끼한 사내의 면상에 뱉어버릴것같았지만 현승은 매혹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 사내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현승의 손길에 흥분했는지 사내는 한껏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의 허벅지위에 놓인 현승의 손을 거칠게 부여잡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카지노 14층에 위치한 룸으로 향했다.
제거대상 NO.09
세계 자산 3위 (상위 1%)
P.레오 (UK)
사내의 손에 끌려 룸으로 가는 동안 이따금씩 느끼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에게 현승은 수줍음을 가득담은 미소를 날려주면서 사내가 눈치채지못하도록 자신의 치골에 채워진 수신기의 버튼을 눌렀다. 성공확률 99% . 오늘의 타겟은 버터기름을 잔뜩 섭취하신 영국인이였다. 이름은 레오로 세계 자산 3위에 랭크되어계신 상위 1% 타겟이였다. 이 타겟을 위해 현승이 받은 명령은 사내를 유혹해서 룸으로 데려오는것. 일단 거기까지 성공하면 미리 잠입해있던 공격수가 필요한 정보를 습득후 사내를 처리할예정이였다. 11.12.13..이제 곧 14층. 룸으로 향하고 있다는 신호를 공격수에게 보냈으니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룸으로만 들어가면 현승 자신의 임무는 성공이였다.
- 칙
룸앞에 도착한 사내가 익숙하게 카드키를 가져다대었고 곧 문이 열렸다. 사내는 현승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곧 자세를 낮추어 현승을 들어올려 자신의 품에 안은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룸안에 위치한 침대로 향했다. 목끝까지 온갖 쌍욕들이 올라왔지만 마지막까지 작전의 성공을 위해 현승이 한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사내의 품에 안기어있었다. 그런데 젠장. 사내는 현승을 침대위에 살포시 내려놓은뒤 손을 들어 현승의 볼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금방이라도 키스할듯 자신의 입술을 현승의 입에 가까이 가져다대었고 당황한 현승이 반사적으로 사내를 밀쳐내었다.
- 쾅..!!
망각했었다. 현승 자신은 지금 임무수행중이고 사내를 유혹해 호텔룸으로 데리고와야하는 연약한 여성의 모습이였다는사실을. 힘조절에 실패한 현승의 손길에 사내는 벽끝에 부딪혀 꽤나 아픈지 신음소리를 내뱉고있었다. 몸매가 드러나는 짧은 블랙 미니드레스. 가슴을 강조하기위해 넣은 여러개의 패드와 촘촘히 짜여진 망사스타킹, 긴 생머리와 한번도 해본적없었지만 꽤나 잘어울리는 옅은 스모키화장, 붉은입술. 현승은 아랫입술을 질근깨물며 치골에 있는 수신기를 여러번 누른후 방안을 둘러보았다.
'씨발.. 공격수 어딨는거야..'
아무리 둘러보아도 공격수는 보이지않았고 일단 급한불부터 꺼야겠다싶어 현승은 서둘러 몸을 가누지못하는 사내에게로 향했다. 사내를 일으켜세우는척 하며 현승은 사내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 후 혹시나해서 늘 항상 지니고다니는 얇은 줄을 꺼내들어 서둘러 사내의 발을 포박했다. 움직일수없도록 포박을 당한 사내가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이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현승을 바라보았고 눈이 마주친 현승이 사악한 얼굴로 싱긋 웃어보였다. 기분나쁜 웃음에 사내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그 모습에 현승이 천천히 사내에게로 다가가 손가락끝을 세워 사내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감히 누가 누굴 넘봐? 오르지못할 나무를 욕심낸죄로 아주 재미있게 해줄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구."
볼을 쓸어내리던 손길을 멈추고 현승은 사내의 귓가에 후 바람을 불어넣으며 마치 속삭이듯이 그러나 살벌한 어조로 내뱉은 말이였다. 그리곤 다시 한번 씨익 웃으며 신고있던 힐을 벗어던지고 거추장스러웠던 드레스의 옆 단을 찢은후 치골에 달아두었던 수신기를 꺼내들었다. 찾아봐도 공격수는 보이지않으니 전략가 단독으로라도 임무를 수행해야하는 상황이였다. 어쩔수없지싶어 현승은 허벅지에 채워진 채찍과 패드와 엉켜 가슴속에 뒹굴고있던 총을 꺼내들었다.
자 - 그럼 한번 시작해볼까?
*
"A 포인트 완료."
쪽 -
손가락운동을 끝내고 키보드위에 손가락을 살포시 얹어놓은지 정확히 7분 28초후 당당한 어조로 전략가 요섭이 총 감독관 두준에게 작업내용을 보고했고 보고가 끝나자마자 잠시 망설이는듯 싶었으나 곧 요섭의 입술에 두준은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수십번을해도 마냥 설레이는지 붉게 타오른 얼굴로 두준이 쑥쓰러운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풋 하고 웃음 지으며 요섭은 두번째 뽀뽀를 받기위해 다시 키보드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해킹을 통해 전 세계 은행들의 서버망에 접속하고 그 중에 타겟과 거래내역이 있는 은행위주로 범위를 축소하고 그 후 주요 거래은행을 각 포인트지점으로 압축시키는것. 이것이 지금 전략가 양요섭이 하고있는 작업의 내용이였다. 현장에 나가있는 전략가 현승이 타겟을 확보하면 조사완료된 포인트지점을 전송해주어야하므로 가능한 빨리 처리해야하는 일이기도했다. 그러나 -
오늘은 전 세계 연인들이 멜랑꼴랑 닭살을 풀풀 풍겨대며 염장질을 제대로 해주신다던 발렌타인데이였다. 오늘같은날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초콜렛을 만들어서 두준과 함께 밤새도록 와구와구 씹어먹으리라 결심했던 요섭에게 새로운 작전의 조사라니, 요섭은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후 미간에 힘을주어 잔뜩 치푸린후 두준에게 강력하게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었다. 잔뜩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두준에게 더 땡깡을 부려볼까고민하다 문득 아주 좋은 생각이나 요섭은 두준의 손을 덥썩잡고는 약간의 사악함을 담아 빙긋 웃음지었다,
"B 포인트 완료."
쪽 -
흐흐흐.. 양요섭은 역시 머리가 좋아. 뽀뽀를 받은 입술사이로 음흉한 웃음을 내뱉으며 요섭이 흐뭇해하고있었다. 핫초코 향이 폴폴 작은 방안을 감싸던 첫날밤 이후로 두준은 죄지은사람마냥 스킨쉽을 자제하고있었다. 쬐끔아프긴했지만 지식인에 쳐보니 처음은 다 그런거라는데 혹시 그것땜에 그런건가, 혹시 그날 밤 처음느껴보는 아픔에 본능적으로 자신의 입밖으로 나온 신음소리에 놀란건가싶어 신경이 쓰이는 요섭이였다. 그렇다고 뽀뽀하고 만지고 싶고 껴안고싶은걸 참을수도없어 고민하고있었는데 때마침 적당한 방법이 떠오른것이다. 하나씩 하나씩 정보를 획득할때마다 두준이 요섭의 입술에 뽀뽀를 해주는것. 이것이 요섭이 두준에게 내민 일종의 제안같은것이였다.
"포인트지점 모두 확보완료. 계좌추적 시작합니다."
확보한 포인트 지점은 총 7군대. 주로 유럽과 미국, 아시아에 아주 고르게 분포되어있었다. 덕분에 받을수있었던 두준의 달콤쌉싸름한 뽀뽀도 총 7번. 보통 재벌들에게는 그들의 재산을 관리해주는 자산관리자가 따로 있다. 1분 1초 쉴새없이 불어나는 돈을 일일이 세고있을수도 없으니 보통은 고용된 자산관리자가 적절히 펀드와 투자 적립으로 분산시켜 관리를 하게 되는데 이때 사용되는 계좌가 생각보다 꼬여있는 경우가 많다. 세금감면을 위해 친인척의 명의를 사용하는 경우도있고 아예 가상의 인물을 명의로 내세워 공계좌를 형성하는 경우도있다. 그러니 지금부터 해야할일은 정확한 포인트지점의 개설된 계좌를 추적해 진짜를 찾아내는것.
요섭은 마음을 가다듬고 손가락을 풀며 슬쩍 두준을 바라보았다. 이제 2단계로 접어들었으니 약속대로라면 스킨쉽도 두번째 단계로 넘어가야했다. 요섭은 익살스런 웃음을 지어보이며 천천히 손을 뻗어 두준의 셔츠자락의 단추를 풀었다. 곱게 드러난 쇄골에 금방이라도 입을맞추고싶었지만 침을 한번 꼴깍 삼키며 요섭은 조심스럽게 입을 가져다대었다. 적극적이다못해 무섭기까지한 요섭의 모습에 두준이 두 눈을 질끈감고선 파르르 떨었지만 내심 다행이다싶었다. 만지고싶고, 안고싶고, 깨물고싶고, 마음껏 뽀뽀도 하고싶은데 요섭의 예상대로 요섭의 신음소리가 자꾸 귀에 멤돌아 두준은 꾸욱 참고만 있었다. 앙 - 셔츠사이로 드러난 두준의 쇄골을 베어물고선 만족스러운지 요섭이 베시시 웃어보이곤 다음 뽀뽀를 위해 서둘러 계좌추적에 돌입했다.
"계좌추적완료. 실 계좌 A:06 만 접속합니다."
임무완료. CREVASS가 도둑이나 도적도 아니고 해적이나 깡패는 더더욱아니니 타겟의 재산이 분산되어있는 수많은 계좌중 하나면 충분했다. 가장 많은 금액이 가장 확실하게 정리되어있는 제거대상 NO.09. 실 계좌는 A :06 (A는 나라코드 즉 AMERICA이고 06 은 은행코드넘버) 였다. 임무도 완료했으니 가볍고 산뜻한 마음으로 요섭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마지막 스킨쉽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까.
"쪼코가 필요해!!"
머리를 굴리던 요섭이 갑자기 주먹을 불끈쥐더니 소리친 말이였다. 초코, 초코렛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아주 많이! 요섭은 서둘러 서랍에 넣어두었던 지갑을 찾아들고 외출준비를 서둘렀다. 대충 옷을 껴입고 집을 나서는 요섭의 입가로 사악한 웃음이 번지고 정신없이 방문을 나서는 요섭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두준이 무엇인가 말을 내뱉었지만 이미 늦은뒤였다. 휴우 침대 아래에 숨겨두었던 상자를 꺼내어든 두준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섭에게 주려고 요섭이 자는사이 밤을 꼬박 새우며 초콜렛을 만들었는데 뽀뽀해줄때 입에 담아서 전해줄걸그랬나 ‥. 괜스레 아쉬움이 남는 두준이였다.
그런 두준을 뒤로하고 가까운 마트로 달려간 요섭은 마트에 진열된 초코렛을 카트가득 마구잡이로 넣고있었다. 오늘 저녁엔 욕조에 초콜렛을 가득 붓고 그 속에 여보를 퐁당 담구어야겠다. 초코가 가득 묻어있는 여보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초콜릿일테니까. 으흐흐.. 다시한번 음흉한 웃음이 요섭의 입가에 멤돌며 요섭은 핸드폰을 꺼내들고 서둘러 두준에게 보낼 문자를 작성했다.
[ 욕조에 물 받아서 깨끗히 씻구기달려 여봉♥ ]
빨리 먹고싶다, 쩝 .. 다 들지도 못할만큼 초콜렛을 사들고선 뒤뚱뒤뚱 걷고있었지만 설레임을 가득담은 발거음만은 가벼웁다못해 날아갈것만같은 요섭이였다.
*
"버터씨 이런거 꽤나 좋아한다며 - ? "
현승이 손에 들린 채찍으로 사내의 턱선부터 가슴 그리고 허벅지를 쓸어내리자 사내가 흥분한듯 몸을 움츠렸다. 흡사 SM물에 등장할법한 여자처럼 채찍을 가볍게 휘두르며 현승은 사내의 성감대를 살짝씩 터치해주었고 그럴때마다 사내의 입술사이로 역겨운 신음소리가 세어나왔다. 좀 느끼라고 해주는 일종의 서비스이긴 했지만 막상 신음소리를 뱉어내니 그 꼴이 또 보기싫어 현승은 사내의 위로 올라타 자신의 허벅지로 사내의 중요부위를 세게 눌렀다.
"으으..하아..'
현승본인은 아프라고 한짓이였지만 드레스의 옆단을 모조리찢어버린탓에 드러난 매끈한 다리가 왠만한 여자보다 고왔기에 그마저도 사내를 흥분시키는 자극제가 되어버려 현승의 귀에 다시 들려오는건 기대했던 비명이 아니라 역겨운 신음소리였다. 곧 죽을 목숨이니 마지막으로 서비스좀 해주려던 곱디 고운 현승의 마음은 역겨운 사내의 신음소리와 자신의 치골주변을 머무르는 사내의 음흉한 시선때문에 솟구치는 짜증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곧 서비의 종료로 연결되었다. 이제 진짜 임무를 좀 수행해볼까 , 현승은 허벅지로 사내의 중요부위를 누른 자세 그대로 가슴에 넣어둔 패드에 숨겨진 조각용 칼을 꺼내어들었다.
"아악..!"
"닥치고 가만계시지? 이제 시작인데 엄살은 - "
현승의 손에 들린 조각칼은 그대로 사내의 가슴으로 향했다. 찢겨진 사내의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가슴에 칼을 가져다댄 현승이 힘을 주어 조심스럽게 글자를 새겨넣기 시작했다. 전략가 장현승님이 한자한자 정성스럽게 새겨넣을때마다 사내의 입에서 비명이 세어나왔고 그 소리가 신음소리보다 백배는 듣기좋아 작업하는 손놀림이 몹시도 가벼운 현승이였다.
변. 태 . 새 .끼. ㅗ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새겨넣은 글씨사이로 붉은 핏물이 고여있었지만 그 모습이 꽤나 멋스러워 피식웃음짓는 현승이였다. 그런 현승을 바라보며 겁에 잔뜩 질린 사내는 아무말도 하지못한체 파르르 떨고있었다. '영광인줄알아. 요즘같은 세상에 공짜로 문신새기기가 쉬운줄 알아? 그것도 최고의 전략가한테 받기는 어렵지, 어려워..~ ' 고개를 내저으며 이것도 다 복이니 대대손손 영광으로 알라며 사악하게 웃음짓던 현승이 본격적인 임무수행을 위해 준비해온 통신기와 PDA, 뇌파측정기계를 꺼내어들었다.
현승은 통신기의 세번째 버튼을 눌러 업로드를 시킨 후 새롭게 형성된 자료를 열어보았다. 요섭이 조사를 마친 타겟이 거래하고있는 은행의 포인트 지점과 그 중에 최종적으로 접속을 결정한 실 계좌 A:06 의 추적자료를 살펴보았다. 필요한건 패스워드와 유서. 혹은 조작된 위임장 정도였다. 현승은 뇌파를 측정하기위한 기기를 사내의 머리와 가슴 그리고 손가락끝에 부착시켰다.
"니가 선택할수있는건 두가지다. 1번.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는다 , 2번. 고통없이 빠르게 죽는다."
선택안은 딱 두가지였다. 살려줄 생각은 전혀 없으니 고통없이 죽거나 고통스럽게 죽거나, 협조만 잘해준다면 편하게 죽을수도있다 뭐 그런말이다. 참을성 부족한 현승이 빨리 결정하라며 눈을 매섭게 치껴뜨고 사내를 바라보는데 사내는 작게 웅얼웅얼거릴뿐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못했다. 아마도 추측하건대 영국식 욕이 아니였을까싶다. 영국인이 아니니 알아들을순없었지만 선택안 두가지가 다 엿같은데 욕 안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대답을 듣는걸 포기하고 현승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선택안은 협조의 유무에따라 결정하면 되는거니까.
"패스워드. 우리가 필요한건 네 눈과 엄지손가락 그리고 패스워드야. 순순히 말하는게 좋을거같은데..어때 버터씨?"
"..쿡... 말하지않으면 열지못하는건가? 그럼 날 죽일수없겠군. 내가 죽으면 패스워드를 영영 알지못할테니까."
"스캔완료 OK- 생일이 7월 11일이야? 뒤에 R은 버터씨 이니셜인가? "
현승의 물음에 사내의 표정이 보기흉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현승이 한 말이 패스워드인듯싶었다. 사내는 뇌파를 폼으로 연결한줄아는 모양이지만 처음부터 사내의 입밖으로 패스워드를 듣는것은 의미없는일이였다. 그저 현승의 질문에 패스워드를 떠올리는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떠오르는 생각과 기억을 스캔하는것은 물론 조작까지할수있는 기계. 언젠가 마음을 들여다볼수있는 기계도 생기는것이 아닌지 첨단과학의 발달에 현승은 문득 소름이끼쳤다. 이 사실을 안다면 아마 초점을 잃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저 사내역시 소름끼치는 두려움에 몸서리치지않을까.
'스캔완료.'
현승이 PDA 위에 사내의 엄지손가락을 가져다대자 짧은 기계음이 울려퍼진후 자동으로 SAVE 되었다는 안내메시지가 떴다. 이로써 사내의 지문을 저장했다. 생각보다 간단한 일에 기운을 뺀것같아 허무한 기분이 드려는데 사내가 안되겠는지 거추장스럽게 눈물을 흘리면서 현승에게 살려달라 호소하기시작했다. 위임장이랑 유서도 받아내야하는데 징징거리는 소리가 듣기싫어 현승은 서둘러 사내의 손에 펜을 쥐어주었다.
"아무글씨나써. 빨리 끝내줄게 - "
현승의 말에 울음을 멈추곤 간절한 눈빛으로 사내가 현승을 한번 쳐다본후 시키는대로할테니 살려만 달라며 펜을 꼬옥 쥐고선 준비된 PDA 에 아무글씨나 적어나갔다. 두어글자만 적으면 되는데 길게도 쓰는 사내를 기다리다 지쳐 현승이 PDA 를 빼앗아들곤 저장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왔던 자신의 재산을 전부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유서를 넣고 저장된 사내의 글씨체로 유언장의 글씨체를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세계적인 호텔에는 없는게 없다더니 거실 한켠에 자리잡고있는 팩스기를 바라보며 돈지랄의 신세계를 보는것같아 현승이 씁쓸하게 웃음지으며 새롭게 만들어진 유언장을 인쇄하기 시작했다.
"으앙........으아앙...으앙..!!"
이제 습득된 정보를 통신기에 업로드시키고 작전본부에 있을 요섭에게 보내주기만하면 되는데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리기시작했다. 이제 좀 그치나싶었더니 사내가 또 통곡하려나싶어 얼른 죽음의 세계로 보내주기위해 현승이 총을 꺼내드려는 찰나 다시 한번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만있자..울음소리가 으앙..으아앙...으아아아앙?? 하아.. 울음소리의 정체는 사내가 아니였다. 너무도 익숙한 이 울음소리는 아마도 -
"...미친새끼. 야 눈깔. 미쳤냐,진짜? 얘를 델고오면..-!!"
요즘 들어 부쩍 기는걸 좋아해서 이리저리 사고만 치고다니는 통통한 볼살의 소유자, 오늘로써 99일된 준이의 울음소리였다. 현승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커튼뒤에 숨어있던 준형이 한 손에 준이를 끌어안고서 모습을 드러냈다.
"설명좀해보시지? 씨발, 공격수가 임무수행안하고 쥐새끼마냥 지금껏 왜 숨어계셨는지?"
"존나 마눌님이 다른 남자품에 안겨있는데 빡 돌아서 나갈수가있어야지. 안말리면 어디까지가나 지켜보고있었다."
"지금 비즈니스 중인거 안보여? 눈깔주제에 주인님 비즈니스도 이해못해주나?"
"씨발 ,,그러니까 내가 하지말랬잖아.주.인.님. 누가 치맛단 찢으래? 채찍가지고 아주 잘 놀더라? 딴 남자 위에 올라타니까 좋았나봐?"
"그러엄~! 누구처럼 올라타기만하면 딸꾹질해대는 남자랑은 차원이 다르더라? 흥분도 좀 돼고 .."
"야! 내가 언제!!!!! 아씨..왜 치마입냐고! 그 화장은 또 .. 그 다리..으악! 그런건 나한테만 보여줘야 될거아냐!!"
"그럼 니가 치마입고 유혹하던가! 총감독이 나아니면 안된다고 막무가내인데 어떡하냐,그럼..! 준이 분유값에 기저귀값 당장 내일이 백일인데 백일사진에 파티에 아주 돈나갈데 투성인데.. 먹고살라고 이러는거아냐!!"
...이건 명백한 권력남용이다. 작고 조그만게 딱 양요섭 내보내면 되겠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였는데 전부 기각하고 독단적으로 다른 조직의 요원인 현승이를 지목한걸보면 따져볼것도없는 권력남용이다. 젠장...더러운 세상같으니라고. 금방이라도 서로 잡아먹을기세로 으르렁 거리는 현승과 준형이 목소리를 높이고있는사이 엄마아빠가 싸우는걸 아는지 준형의 품에 안긴 준이가 다시 울기 시작하고 그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사내도 금방이라도 울 테세로 울먹이고있었다. 분유값에 기저귀값, 백일촬영비용에 백일파티까지. 애 키우는데 어찌나 돈이 많이 드는지 돈문제로 현승이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고있다는 사실을 알고있었기에 준형은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할수없었다.
"..준이는 왜 델고왔어?! "
"너 하는꼴 잘 보라고. 니 엄마 아빠두고 지금 바람핀다 친절하게 설명해준거야."
준형의 품에 안겨 울고있는 준이를 자신의 품으로 데리고와 현승이 토닥토닥 조심스럽게 달래며 한 손으로는 퍽 소리나게 준형의 머리를 내리쳤다. 한 아이의 아빠이자 가장이라는 놈이 저리 철이 없어서야 .. 현승이 고개를 내저으며 준이를 안은손에 바운스를 주어 흔들의자에 탄것마냥 조심스럽게 위 아래로 흔들었다. 이렇게 해주면 울음을 잘 그치곤했던게 기억이나 현승이 온 신경을 준이에게 쏟고있는 그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저기..저는..그만 내보내주시면..."
"아...씨발..너 잘만났다. 내가 너한테 할말이 겁나 많았거든? 존나 예뻐서 꼴리는건 이해하겠는데 여기 미친새..아니 미..미치게 이쁜..아..아니 멋진 장현승 애딸린 유부녀거든? "
자신이 내뱉은 말에 현승의 눈치를 살피던 준형이 살벌하게 노려보는 현승의 눈빛에 조심스럽게 말을 수정해나갔고 그제서야 마음에 쏙 드는지 노려보던 눈을 살포시 부드럽게 바꾸는 현승이였다. 휴우, 알몸으로 문밖에 쫒겨나진않겠네. 준형은 현승이 알아채지못하도록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사내에게로향했다. 그리곤 총을 꺼내들어 정확히 사내의 이마에 가져다댄뒤 방아쇠를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자신의 이마에 놓여진 총구에 사내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몸이 매섭게 떨리고있었다.
"그러니까 머리에 총알박히기 전에 똑똑히 알아두라고. 용준형의 주인님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건지 - "
- 탕
짧은 총성이 이어지고 죽음을 맞이한 타켓 NO.09 세계 자산 3위에 랭크되어있는 영국인 레오는 다음날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유서와 함께 신문1면을 장식했고 현승이 요섭에게로 전달한 패스워드와 지문 그리고 위임장은 실 게좌 A:06 의 거래내역을 모두 CREVASS 의 계좌로 돌리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그리고 -
11월 26일.
아기광이 처음으로 좋아해 라는말을했다. 뽀로로에 나온 대사를 따라한거지만 몰래 녹음해두고 매일매일 듣고있다,
언젠가는 내게도 말해주는날이 올까.
12월 14일.
잠들어있는 아기광의 볼에 살짝 입을 가져다대었다. 심장이 고장난것처럼 쿵쾅거리고 볼이 타들어갈것처럼 뜨겁다. 잠들어있는 기광이는 가끔 천사가 아닐까 착각이든다. 하늘로 슝 하고 날아가버리는건 아닌지 .. 나무꾼이 선녀의 옷을 숨긴것처럼 날개를 부러뜨리면 영원히 내 곁에 있어줄까?..
잠에서 깨어난 자신에게 사람들은 모두 기나긴 꿈을 꾼것이라말했다. 동운은 벌써 다섯번째로 보는 다이어리를 한장 한장 다시한번 곱씹고있었다. 다이어리가득 기광에 관한 이야기들이 빼곡하게 늘어져있는데 이 모든것이 꿈이라니 - 동운은 보고있던 다이어리를 품에 안았다. 조금이라도 기광의 숨결이 느껴질것만 같아서였다. 정말로 모든것이 꿈이였을까. 꿈이아니라면 기광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걸까 ..
:) 01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던가 혹은 시간이 지나고있으니 잊을수도있을거라는 말따위는 이미 그 효력이 상실된지 오래였다. 꿈속에서 만들어진 허구의 인물이라는 이기광은 처음부터 손동운 마음의 주인이였던것처럼 그 안에 자리잡은체 움직이지않았고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그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린체 잊혀지지가않았다. 그저 시간에 취해 조금쯤 담담하게 살아내려 의미없는 움직임으로 동운이 조직에서의 해야할일을 묵묵히 해내고있을때 거짓말처럼 동운의 눈 앞에 [그가 나타났다.]
*
무엇이라도 하지않으면 견딜수가없었다. 얼마간의 시간동안은 기광과 함께였던 방에 틀어박혀 기억을 더듬으며 마음에 남아있는 기광을 느끼기위해 동운은 무던히도 애를 썼었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 기억을 더듬어서 손동운안에 있는 이기광의 흔적을 찾아헤메면 헤멜수록 보고싶어 미칠것만같았다. 그러나 처음 손동운의 앞에 마법처럼 나타났듯이 기광은 마법처럼 자신의 곁에서 사라졌다. 그를 기억해야할 모든 사람들은 그가 세상에 존재하지않는 사람인것처럼 허구적 인물이라 말했고 믿을수없었던 사람들의 말도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져갔다. 그는 없다. 하지만 그가 나를 떠났을리가없다. 이기광이 손동운을 .. 떠났을리가없다.
또다시 기광의 해맑았던 웃음이 눈 앞에 아른거리자 동운은 고개를 내저었다. 기억의 조각들은 쉴틈도없이 마음을 헤집고 눈부셨던 기광의 모습들은 잊혀질생각조차없다는듯 눈 앞에 아른거리는데 그 어디에도 기광은 없었다. 그 사실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않아서 동운은 무엇이라도 해야만했다. 기광을 잃은건 마치 모든것을 잃은것처럼 손동운을 무기력하게 만들었지만 이대로 주저앉을수는 없었으니까. 동운은 서둘러 마음을 추스리고 모든 생활을 정상으로 되돌려야했다. 자신에게서 기광을 잊게만드는게 사람들이 거짓을말하는 목적이라면 그 목적이 달성되었을때 사람들은 자신에게 진실을 말해줄테니까. 그것이 기광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동운에게 남겨진 단 하나의 희망이였다.
"멋지다~!"
사춘기 소녀처럼 기광이 떠나간뒤로는 쉴세없이 터져나오는 눈물때문에 동운이 애써 울지않으려 눈에 힘을주며 연구에 더욱 집중하고있을때 아주 익숙하고도 따뜻한 소리가 들려왔다. 동운은 빠르게 고개를 돌려 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붉은 빛이 감도는 와인빛 머리칼, 웃을때 예쁘게 반달로 접히는 눈, 하얀피부, 별이 담긴마냥 반짝반짝였던 눈망울, 검은제복과 자신을 처음만났을때 들려주었던 '멋지다' 는말. 오랜만에 보는 그는 머리색도 제복의 모양도 분위기도 달랐지만 틀림없는 손동운의 아기광이였다. 동운은 눈 앞에 있는 기광을 놓칠까봐 빠르게 달려가 품에 안았다. 아무데도 갈수없도록 동운은 기광을 안은 손에 더욱 힘을준체 조용히 흐느꼈다. 두 볼을타고 거추장스럽게 눈물이 흘러내리고 기광을 품에안은 지금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않아 미치도록 불안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렇게 다시 돌아와주었으니까.
기광이 떠난지 반년이 지났다.
[...돌아와주면안돼?]
신호음도 울리지않는 휴대폰에 대고 듣지도 않을 음성메시지를 수백, 수천통을 남겼었다. 어떤날은 울고 어떤날은 담담하게 또 어떤날은 소리를 지르며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도 바랬었다. 메마른 가슴을 끌어안고 두 손이 닳아없어질정도로 쉬지않고 기도했다.
그러기를 반년.
기적처럼 그가 ‥ 돌아왔다.
*
"현재 조직 CREVASS 는 특별한 요원의 변동은 없으며 총감독관 윤두줌의 지위빽시 변동없는걸로 보고받았습니다. 몇달간 특별한 활동없었으며 현재 해외쪽으로 활동을 넓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벽면을 덮고있는 커다란 스크린에 윤두준을 비롯한 몇몇 조직원들의 사진이 펼쳐지고있었다. 킬러조직 CREVASS에 대한 브리핑을 위해 국정원 소속 요원이 노트북을 바라보며 설명을 이어가고있었다. 언더커버요원으로 요섭이 CREVASS에 잠입했을때 얻어온 정보들과 요섭이 설치해놓은 도청장치를 통한 분석으로 이루어진 브리핑의 내용에는 최근에 이루어지는 조직활동에 관한 정보가 미흡했고 때문에 듣고있는 팀장의 표정이 작게 일그러졌다. 자신이 거느리고있었던 언더커버요원이 본인의 책임을 져버리고 배신을 했으니 CREVASS 소탕작전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기때문이였다.
" 그만. 이팀장만 남고 모두 나가도록 - "
더이상의 회의가 의미가없음을 알고있었기에 국장은 과감하게 회의를 중단시키고 회의실에 있었던 모든 요원들을 내보낸후 CREVASS 소탕작전의 총 책임을 맡고있는 팀장만을 자리에 남겨두었다. 팀장 자리에 오르고 처음으로 맡겨진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못했으니 적잖게 쓴소리를 듣겠구나싶어 벌써부터 팀장의 얼굴에는 그늘이 졌지만 국장의 표정은 몹시도 평온해보였다. 흡사 이미 전쟁에서 이긴 승리자처럼 몹시 여유로운 모습이였다. 국장은 자신의 앞에서 잔뜩 위축되어 고개조차 들지못하는 팀장을 한참 바라보다 작게 웃음을 띄우며 입을 열었다.
"이팀장. 가장 무서운 적이 누군지 아나?"
"....예..?...갑자기 무슨.."
"아무것도 가지지않은 사람이다. 아무것도 가지지않은 사람은 잃을것이없으니 두려움도 없지. 그런 사람을 상대로 이기는건 무척이나 어려운일이야. 하지만 - "
".........."
"무언가를 가지고있는 사람은 자신의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지는 법이라네."
국장이 들려주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못해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팀장에게 국장은 인자하게 웃어보이며 책상위에 올려져있던 사진한장을 내밀었다. 국정원 소속 최연소 요원 양요섭의 사진이였다. 사진을 받아든 이팀장이 사진속 웃고있는 요섭의 얼굴과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국장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의미를 파악하려 애쓰고있던 순간 [ ..사랑 때문이라지? ] 라고 말하는 국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이라고했다. 자신이 왜 돌아올수없는지를 설명하던 요섭의 입에서 나온 단 하나의 이유였다. 반년전 [미안해요, 선배..]라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끊어졌고 국정원 팀장 이준이 무척이나 아꼈던 후배 양요섭은 돌아오지않았다.
"사랑이라‥. 총감독관 윤두준에게도 약점이 하나 생긴셈이군."
"..........."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나?"
"............"
"쿡 ..- 우리에게 충분히 승산있는 게임이라는거지. "
냉소적인 웃음을 지어보이는 국장을 바라보며 이준의 목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표면적으로 CREVASS 라는 조직자체는 정의롭지못한 조직임에 틀림없었지만 사람이 사람에게 느끼는 가장 숭고한 감정을 이용하는 국장이 어쩐지 역겹고 비겁해보여서 이준의 표정이 드러나지않게 일그러졌다. 귓가에는 사랑이라고 말하던 요섭의 말이 메아리처럼 멤돌고 손에 들린 사진속 웃고있는 요섭을 보니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문득 두렵게 느껴지는 국정원 팀장 이준이였다. 요섭을 믿었던 자신을 배신하고 속해있는 조직을 배신했지만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던 아이였음을 그래서 그 배신마저 이해하고싶게끔 만드는 아이였기에 어쩐지 이준의 마음한구석이 쓰려왔다.
"아깝군. 살인을 저지르는 킬러에게 지어주기엔 너무 아까운 표정이야. 양요섭요원, 자네 아래에 있던 요원이라고들었다. 무척이나 가까웠다지? 쓸데없는 연민같은건 집어치우게나. 이미 미끼를 던졌으니 이제 곧 입질이올거야. 입질이오면 다음계획부턴 자네에게 맡기겠네."
"...네."
"똑바로 기억해두는게 좋을거야. 난 승산있는게임에서 지는걸 무척이나 싫어하거든."
*
"안아파요, 따끔해요, 따금따금~~"
이라는 간호사의 말이 벌써 아홉번째로 작은 병실안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처음처럼 친절한 목소리로 말하려 무척이나 애쓰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간호사의 표정은 곤란함으로 변해가고있었고 간호사의 옆에서 이 모든걸 지켜보고있는 현승은 한심함을 넘어서 어이가없다는 눈빛을 하고있었다. [아빠 맞는거 봤죠? 하나도 안아파요!] [아이구, 잘맞는다 ! 누구 닮아서 이렇게 씩씩해?] 라는 말들이 병실한켠에서 들려오고 태어난지 얼마안된 작은 아기들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주사를 맞을 준비들을 하고있었다. 그 아기들의 부모로 보이는 엄마와 아빠들은 방긋방긋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듯 아기에게 보여주기위해 주사를 맞고있었고.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현승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저런짓이나마 할수있을줄알았다. 손발오글거리는 토나오는 대사들이지만 감기에 걸려 콜록이는 준이를 위해 저런짓이라도 해야지싶었다. 그런데...젠장.
"준이 아버님, 쉼호흡 한번 할게요. 자 눈 감으시고 크게 숨 들이쉬고 후 ~~ "
"후우~~ .. 아야..!!!"
도저히 안되겠었는지 간호사가 덜덜 떨며 울먹이는 준형에게 쉼호흠 한번 하자며 숨을 크게들이마쉬는 흉내를 내보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은체 간호사를 따라하던 준형의 팔에 덥썩 주사바늘이 들어왔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도전에 비명이 먼저 튀어나오고 주사때문에 생긴 얼얼한 통증때문에 바늘이 빠져나간 뒤에도 준형의 울먹거림은 멈추지않았다. 열번을 넘기지않은것에 감사를 해야하는것인가. 아홉번을 내내 '누나, 잠깐만요.. 누나..제발요..으악..! 누가 잠깐. 안돼안돼!!' 만 연신외치며 주사바늘이 자신의 팔 근처에도 오지못하게 만드는 이름만 한 가정의 가장이요, 남편이며, 준이의 아빠인 용준형이 열번을 넘기지않고 열번째에 주사를 맞았으니 맞아준것에대해 진심으로 감사해야할것같은 기분이 드는 현승이였다.
땡깡부리는 무늬만아빠 용준형 팔에 주사놓으시느라 수고하신 간호사님께 눈빛으로 감사의 인사를 날리며 현승은 품안에 안겨 주사맞을 준비를 하고있는 준이를 바라보았다. 묘하게 닮았다. 그럴리가없는데 자신과 준형을 쏙 빼닮은 이 아이가 정말 자신의 아이가 아닌지 의심이 갈정도로 준이는 두 사람을 무척이나 닮아있었다. 현승이 생각에 잠겨 준이와 눈을 마주치고 바라보는데 베실베실 준이가 웃기시작한다. 그 모습이 너무도 예뻐 현승의 입가에도 따뜻한 미소가 지어졌다. 울지도 않고 때쓰지도않고 심지어 베시시 웃어보이면서 씩씩하게 주사도 잘맞은 우리 준이는 분명 자신을 닮은게 틀림없다. 주사 바늘 무서워서 눈물콧물이나 짜대는 용준형을 닮았을리가없다. 암, 그렇고말고.
"..팔 욱씬욱씬거려..호해줘."
"미쳤어?'
"그럼 저 길다란 바늘이 내 살을 뚫고 들어왔는데 내가 안미치게생겼어?...ㅜㅜ"
"그렇게 겁이많아서 사람은 어떻게 죽이신대?"
"야..! 그건 ..!! 내가 좀 멋있잖아..총같은건 쫌 잘다루지내가..푸헤헤..."
"..멋있다의 사전적의미는 아는거냐? 됐고 내가 아빠할래."
용준형은 예방접종을, 준이는 백신을 맞고 소아과에서 나오는길 준형이 자신의 팔을 문지르며 어깨가 축축 쳐져서는 현승의 옆에서 계속 칭얼대고있었다. 그런 준형을 한번 쳐다봐주지도않은체 준이를 안은체 발걸음을 재촉하는 현승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 보니 준형은 벌레도 무척이나 싫어했었다. 싫어한다기보다는 무서워한다는거에 더 가깝긴하지만. 혹시 더 살다보면 자신이 모르는 다른것들이 더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문득 함께 살아가야할 수많은 날들이 막막하게 느껴지는 현승이였다. 그러니 과감하게 아빠자격을 박탈하겠다는것인데 그말에 펄쩍펄쩍뛰며 용납할수없다는듯 두눈을 시퍼렇게뜨고선 현승을 노려보는 준형이였다.
"처음부터 아빠, 엄마는 누가 정한거야? 그러고보니 내가 왜 엄만데!!"
"그..그..그거야..야! 넌 왜 맨날 무슨 이유가 그렇게 필요해! 엄마면 엄만거지, "
"야 눈깔. 저거 죽여봐."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신이 엄마여야하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어느날부터 준형이 준이에게 현승을 엄마라고 소개했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다보니 현승자신도 내가 엄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을뿐 꼭 그래야만하는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결코 절대 받아들일수없는 준형은 딱히 댈 이유도없으면서 소리만 뺵뺵 질러대며 따지고있었고 보다못한 현승이 무언가를 가리키며 준형에게 말했다. 그말에 자신도 모르게 '넵, 마님' 이라고 내뱉고 현승의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아악!' 죽이기는 커녕 소리부터 지르는 준형이였다.
현승이 가르킨곳에는 작은 벌레한마리가 힘겹게 날개짓을 하며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날아가려애는 쓰고있었지만 거의 죽은목숨이나 다름없었는데 벌레를 무척이나 무서워하는 용준형에겐 거대한 괴물보다 더 두렵게 다가온 모양이였다. 발견하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빛의 속도로 뒷걸음질치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현승이 그럴줄 알았다는듯 혀룰 내두르다 이내 입가에 잔잔하게 웃음이 묻어났다. 알고는 있었지만 저만치서 벌벌 떨고있는 준형이 새삼스럽게도 귀여워서였다. 현승은 죽어가는 벌레를 발로 꾸욱 밟을까하다 직업의 특성상 워낙에 많은 살생을 저지르고있으니 죽어가는벌레정도는 살려주자는 차원에서 사뿐히 지나쳐 떨고있는 준형에게로 향했다.
"벌레도 못죽여, 주사도 못맞아. 준이가 뭘 보고 배우겠냐?"
"다..다른거! 나 밥 잘먹잖아. 니가 만들어준거 군말없이 다 먹잖아,내가!! "
"맛있어서 먹는거겠지. 내가 너보다 요리는 좀 하잖아?"
"흐흐흐..그건그래..흐흐..우리 현승이가 요리는 좀 하지..푸헤헤 '
"...쯔쯔..지랄도 병인데."
라고 말하곤 있지만 내심 기분은 좋은 현승이였다. 이길려고 덤비는건지 말장난이 하고싶은건지 아니면 팔불출남편인거 티내고싶으신건지 바보처럼 혀짧은 웃음소리를 내뱉는 준형때문에 현승이 준형이 보지못하도록 고개를 푹 숙인체 웃음지었다. 이렇게 기분좋은 느낌이 드는건지 몰랐던건 아니였지만 항상 이런 기분이 들때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하는건지 아직은 너무도 어색한 현승이였다. 때문에 [용준형은 장현승을 겁나 사랑함]이라고 얼굴에 대놓고 써붙이고다니는 준형때문에 기분은 날아갈듯이 좋으면서도 현승은 꾹 눌러담아 아무렇지않은듯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곤했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저 눈 앞에서 꼭 웃어보여야지 매번 결심 하면서 현승은 또 지키지못한체 고개를 숙여 숨죽이며 웃음지었다.
현승이 고개를 숙인탓에 품에 안겨 엄마의 웃음을 바라보게된 준이도 두 눈이 예쁘게 휘어지며 맑게 웃음지었다. 항상 별것아닌 문제들이였다. 누가 아빠고 누가 엄마인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지 - 혼자가 아니기에 부족한건 채워주면되는거였다. 아마도 준형에게는 들리지않았겠지만 현승은 작게 [..내가 지켜줄게] 라고 읊조렸다. 준형을 위해서 벌레 한마리쯤 죽일수없겠는가. 대한민국 서울 도심 한 가운데에 몹시도 닮아있는 세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한 미소를 띄우고있었다.
*
"선배 - 아무리해도 안돼요.. 선배는 진짜 천잰가봐 .."
"음..그러니까 일단은 너만의 프로그램을 가지는게 좋을거같은데. 내 방식으로 하려고하지말고 네 방식을 만들면 좀 편할거야."
조직내에서 선배라는 호칭을 사용해본적이 없었다. 서로의 익명성을 보장하고 비밀을 유지하는것만이 서로가 살아남는길이라 믿었기에 필요이상으로 가까이 지낼이유도 친근함을 나타낼 이유도 없었기때문이였다. 때문에 CREVASS 내에서 유일하게 선배라는 호칭을 사용하는공간이 전략가 양요섭이 멘토로 있는 정보-2 회의실이였다. 그 방의 주인은 전략가 양요섭이고 전략가 꿈나무들을 교육하는 방식역시 양요섭 단독권한이였기에 기존의 방식을깨고 친근한 방식을 도입한것에대해 불만을 가질 이유도 가진다한들 말할권리도 총감독관 윤두준에게는 없었다. 다만 -
"그러니까 이럴땐 이렇게 - "
"흠흠.. - "
두준이 헛기침을 두어번 내뱉은 뒤에야 누군가 온것을 눈치챘는지 요섭과 전략가 꿈나무인 어린 소년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헛기침의 주인공이 총감독관 두준임을 알아차린 어린 소년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고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그만 가보겠다며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소년이 나간것을 확인하고나서야 요섭이 굳어있던 얼굴을 펴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두준을 바라보다 폴짝 가벼웁게 두준의 품안에 안겼다. 자신의 품에 쏘옥 들어오는 요섭을 받아들이면서 부드럽게 요섭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는했지만 어쩐지 표정이 어두운 두준이였다.
"여보~~"
"아. 응."
깊은 생각에라도 잠긴사람처럼 초점이 흐린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준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요섭이 불렀고 한참 후에야 반응을 하며 여전히 굳어있는 표정으로 두준이 요섭을 바라보았다. 무슨일이 있는걸까 - 물어도 대답을 해줄것같지않아 요섭은 무슨일이냐고 묻는 대신 두준의 입술에 가볍게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그리곤 아무일도없었다는듯 평소처럼 ' 밥은먹었엉?? 난 배고픈데..힝 밥 머그로가자!! 웅웅??!" 하며 애교부리기에 바빴고 땡그란 눈으로 예쁘게도 웃음짓는 요섭이 귀여워 두준은 하던 생각을 멈추고 요섭을 향해 옅게 웃음지었다. 유쾌한 웃음은 아니였지만 옅게나마 자신을 향해 웃음지어주는 두준이 고마워 요섭은 두준의 손을 꼭 붙잡고 함께 매일 아침을 맞이하는 둘만의 공간으로 향했다.
"저..저기 근데 -.."
"웅?? 뭐?"
"교육할때..그러니까..그..꼭 그런 자세로....교육을..해야만하는...........거.....후우.."
풋.
그러니까 어울리지도않게 질투를 하셨다? 어린 소년이 컴퓨터앞에 앉아 질문을 할때 요섭은 마우스에 올려진 소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뒤에서 안은 자세로 교육을 진행하고있었다. 멘토로서 전략가 꿈나무들을 교육시킬때면 항상 저 자세로 교육을 진행하는 요섭이 사실은 너무도 마음에 들지않았던 두준이였다. 조직을 위해 열심히 교육을 행하고있는 전략가한테 신경질을 낼수도없고 또 그것이 잘못된것도 아니니 화를 낼 이유도 없었던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를 낼 이유는 없는데 화는 나고 마음이 마음처럼 되지않아 꽤나 고생을 했던 두준이였다. 그러다 결국 언짢은 마음이 표정에 드러나고 말할수는 없으니 무슨일이 있는 사람마냥 표정이 굳어있었던거였다. 사랑이라는 감정도 모르고 살았으니 사랑에 따라오는 질투라는 감정을 모를수밖에 -
"우리 여보는 뭘 먹고 이렇게 귀여운걸까??"
그동안 꼭 하고싶었던 말이 입밖으로 나오긴했지만 그런말을 내뱉은 자신을 이해할수가없어 두준이 고개를 푹 숙인체 곤란한 표정을 지었고 요섭은 맞잡은 손을 놓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한 두준을 바라보았다. 정말 뭘 먹고 이렇게 귀여운거지?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요섭이 머리를 굴리기시작했다. 아무래도 알아내야하지싶었다. 귀여운건 양요섭꺼니까 자꾸만 넘보려는 두준을 이기려면 뭘 먹는지 알아야했기때문이였다. 그러다 문득 평생 이 사람을 사랑하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어 요섭은
두준의 넥타이를 잡아당겨 자신의 쪽으로 기울게한뒤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다른 사람앞에서도 그런 소리하면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않을거니까 각오해.' 아마 이 순진한 총감독관은 이 말이 본인이 하고있는 질투와 다를게 없다는걸 모르겠지만.
지잉 -
넥타이를 잡아당긴김에 진하게 키스나 한번 할까 고민하던 찰나 요섭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중요한일일지도모르니 확인을 해야만했지만 어쩐지 휴대폰을 꺼내어드는 요섭의 표정이 좋지않았다. 혹시나했는데 역시 - 오늘로써 세번째였다. 자신이 두준과 함께있으면 어김없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의문의 문자가 도착했었다. [....떨어져.] 살벌한 메시지만큼이나 끔찍한 기분이 들어 요섭은 소름이 끼치는것같았다. 한번이였을땐 누군가의 장난이려니했었지만 벌써 세번째. 같은 문자가 반복되어지고있었다. 도대체 누구인걸까.
:) 02
[이제와서 왜] 라는 현승의 물음에 [동운이가 나를 용서한다고해도 내가 나를 용서할수가 없어] 라고했었다. 사랑하면서 사랑인줄을 몰랐고 미치도록 아끼면서 아껴주는방법을 몰랐다. 그런 스스로를 용서할수가 없어서 손동운에게서 이기광의 존재를 지워주고싶었다. 이기광을 사랑하기때문에 아버지를 잃었으면서 바보처럼 영원히 이기광만을 사랑하겠노라 말하는 손동운이 자유로워질수있도록‥ 나를 잊고 편안해질수있도록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났다. 함께 걷고싶었던 거리에 벚꽃이 휘날리고 따스한 온기를 담은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왔을때, 이기광이 손동운의 곁을 떠난지 179일의 시간이 흘렀을때 그제서야 알았다. 이기광이 손동운을 떠난 이유는 손동운을 위해서가 아니였다는걸. 그때‥ 꽉 막혀있던 심장에 따뜻한 바람이 세어들어와 쓰디쓴 심장을 감싸안았던 그때 - 햇살이 빛나던 늦은 오후. 언제나 넘칠만큼 이기광을 사랑해주었던 손동운에게 꼭 들어야할말이 있었다.
*
훈련의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리고 강도높은 훈련에 지친듯 공격수 꿈나무들의 투정어린 볼멘소리가 지하에 위치한 훈련실에 퍼지고 있었다. 정확히 공격수로 온것인지 아니면 멘토로서 온것인지 확신이 서지않았으나 어쨌든 훈련생들의 교육을 담당하고있는 기광을 보기위해 동운이 훈련실 구석에서 수건을 든체 서있었다. 워낙에 날렵한데다 훈련쯤 우습게 여겼던 공격수답게 많은 땀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아기광의 얼굴을 닦아주기위해서였다. 두근두근 - 사람들이 왜 장거리 연애를 하나했더니 이런 묘미가 있었다. 6개월만에 만난 기광은 작은 손짓하나, 미묘한 표정하나에도 동운의 심장을 손에 쥔체 주무르는것마냥 미친듯이 뛰게만들었다. 오랫동안 떨어져있다 만나면 기쁨도 두배가 되고 뭐 그런게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모양이다싶어 떨여져있었던 반년의 시간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운이 세어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못한체 히죽거리는데 어느샌가 눈 앞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예쁘게도 맺힌 기광이 와 있었다.
"무슨일있으십니까? 오후에 가야하는 흥신소때문이라면 늦지않게 - "
쓰담쓰담 -
기광이 자신을 기다리고있는듯한 동운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 묻는데 기광의 말을 다 듣지도않은체 동운이 손을 들어 안으면 품에 쏙 들어올정도로 자신보다 작은 기광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동운의 행동에 기광이 동운을 바라보았고 당연하다는듯 동운은 웃어보일뿐 아무런말도하지않았다. 그러다 곧 손에 들린 수건으로 기광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고 멀뚱히 자신을 올려다보며 곤란한 표정을 짓는 기광을 꼬옥 끌어안았다. 혹시 몰라 챙겨온 사탕을 내밀지는 못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싶어 동운은 기광을 안은손에 힘을풀며 옅게 웃어보였다.
"같이가 - 의뢰내용도 잘 모르잖아. 밥도 먹어야하구,, 이따가 방으로 갈게. 이따가봐. 우리 이쁜 아기광^^ "
"저기.. 다시 한번말하지만 전 - "
"알아. 니가 공격수 이기광이라는거 아주 잘알아. 나만큼 너 잘아는 사람도 없어 ‥ 그러니까 닥치고 가만있어."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자신을 대하는 동운에게 기광은 몇번이나 자신의 존재를 설명했지만 달라지는것은 없었다. 언제나 마치 단 한순간도 헤어져있었던적은 없었다는듯 동운은 반년전 모습 그대로 기광을 대했다. 아무것도 묻지않았고 아무것도 들으려하지않았다. 동운은 예전처럼 기광을 대하고 기광은 현재의 자신을 설명하고 그러면 동운은 또다시 귀를 막은체 흐릿하게 미소짓는 이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되고있었다. 기광은 멀어지는 동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번도 자신에게 험한말을 해본적이없는 사람이였다. 한번도 자신에게 차가운 눈빛을 보여준적이없는 사람이였다. 그런 동운이 애절함이 묻어나는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기광을 두고 돌아서는 걸음이 혹시라도 휘청거리지않을까 겨우겨우 떨리우는 몸을 지탱하고 간신히 훈련실을 빠져나온 동운이 벽에 기댄체 가뿐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멎어 숨을 쉴수가 없었다. 익숙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때 기광은 자신에게 [공격수 이기광입니다. 무기제조원이라는 이야기는 얼핏들었는데 듣던대로 멋지시네요 ] 라고 말했다. 마치 처음본 사람처럼 ‥. '동운의 기억속에 존재하는 이기광은 꿈속에 존재했던 허구적인물이다' 라는 사람들의 말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전혀 다른사람인척구는 기광은 몹시도 낯설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 미치도록 좋았다. 돌아온게 너무 기뻐서 모르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왔다고 소리라도치고 싶은 심정이였다.
동운은 주머니에 넣어둔 딸기맛 사탕을 꺼내어들고 기광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어쩌면 이 사탕의 주인은 이제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투니버스TV를 즐겨보고 뽀로로와 뿡뿡이를 사랑하고 짱구를 동경하던 아기광은 이제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붙들고싶어졌다. 아무렇지않은척 굴면 아무렇지않은게되지않을까 ‥. 동운은 애써 웃음지었다. 한 시간후엔 함께 점심을 먹어야하고 그 후엔 교대근무를 위해 흥신소에 가야했다. 이렇게 계속 함께있다보면, 예전처럼 기광을 대하다보면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동운은 천천히 벽에 기대어진 몸을 일으켜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
타겟의 설정은 간단했지만 접근방식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두어명쯤 죽이니 제벌들답게 상황판단들이 빨랐고 덕분에 맞서야할 적이 생겨났기때문이였다. 조직의 이름을 정확히 알수는없었지만 재벌들에의해 만들어진 조직답게 그들의 재산과 목숨을 노리는 CREVASS 로부터 그들의 신변과 재산을 보호해주는것이 조직의 목적이라고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지가 사흘전이니 지금쯤이면 앞으로 어떻게해야할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몇 가지 방안이 나와야했을시간이였다. 그러나 -
"우리도 결혼할까?"
어디서 뭘 보고온건지 조직의 안위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않은체 요섭은 멀뚱멀뚱 뚫어져라 두준의 얼굴만을 쳐다볼뿐이였다. 그리고 저 질문은 벌써 열번째, 오늘로써만 열번째로 하고있는 질문이였다. 두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화를 내야하는데 순한 얼굴로 두 눈을 반짝이고있는 자체발광귀염귀염 요섭에게 화를 낼수도없고, 그저 끓어오르는 화를 꾸욱 누르며 저 대답에 어떻게 둘러대야할지를 생각했다. 이틀째 질리도록 듣고있는걸보면 회피만으로는 끝나지않을 질문임에 틀림이 없었다.
"전략가 양요섭이 이거풀면 생각해볼게 - "
"와아 ~ 진짜? 진짜,진짜,진~~~짜??! 아싸! 풀게풀게. 먼데~? 이래뵈도 나 천재라구 ! "
풀면 결혼을 할게 - 도 아니고 생각해볼게임에도 폴짝폴짝뛰며 당장이라도 결혼식 올릴사람처럼 들떠서는 요섭이 자신이 풀어내야할 문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요섭을 바라보며 두준이 피식 웃음지었다. 이제 아주 쬐끔쯤 양요섭 다루는 법을 알았다고해야하나 -? 그나저나 대체 정말 어디서 뭘 보고 주워들었길래 갑자기 결혼타령인지 두준의 머리가 다시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역시 곤란한 질문이였다. 기광도 다시 돌아왔고, 이 모습을 기광이 어떻게 보고있을지도 신경이 쓰이니까 -
"으앙...!!"
열심히 문제를 살피던 요섭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지더니 곧 입밖으로 투정어린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무래도 어려운 모양이였다. 두준이 요섭에게 맡긴건 진짜를 찾아내는일이였다. 새로운 타겟을 설정해야하는데 보안이 워낙에 강해진데다 스스로의 신분을 숨긴체 대리인을 내세우는경우가 많아져 진짜 타겟을 찾기가 더욱 어려워진것이다. 단서는 몇명으로 추려진 타겟의 후보들과 그들의 최근행적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만으로 타겟 NO.24 프랑스계 상위 6% 제인을 찾아낼수있는걸까.
"줘봐. 파일 현승이한테 보내야겠다."
아무래도 요섭에게만 맡기는것보단 타조직의 전략가이기는하지만 옛정을 생각해 잔뜩 부려먹고있는 총감독관 두준이 이번에도 부려먹기위해 새로운 일거리를 던져주려는데 요섭이 갑자기 도끼눈을 하고선 두준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왜 ..?] 겁에질린 표정으로 두준이 요섭에게 물었고 요섭은 아무말없이 그저 금방이라도 울듯한 눈으로 두준을 향해 째림을 날릴뿐이였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 ?
"..내가할꺼야!! 할쑤있오!! "
"그래, 할수있는데 현승이도 같이하면 더 빨리 할수있을지도 모르잖아, 그지?"
".................으앙!! 시러시러!! 혼자서 할수있어!!"
"그래, 아는데 그래도 빨리 하면 좋은거잖아. 그러니까 현승이한테 - "
"딴 전략가 없어?! 여봉, 내가 아끼는 제자하나가 있는데 그럼 걔한테 넘길게. 응??"
대화가 여기까지 진행이되니 두준이 얻을수있는 결론은 단 하나. 양요섭이 장현승을 싫어한다는거 - ? 그런데 왜? 일단은 달래는게 좋겠다는 판단에 아예 주저앉아 울기세로 닭똥같은 눈물을 쥐어짜는 요섭에게로 두준이 다가가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내주었다. 앉은 자세로 요섭과 시선을 마주하고 한 손으로는 볼을 어루만지고 한 손으로는 등을 토닥여주며 두준이 입을 달싹였다.
"뚝! 누가 우리 귀여운 마눌님을 울렸을까 ? 지금 안이르면 다음 기회는 없는데 권력남용한번 해보게 일러봐 , 얼른! "
*
"준아 글쎄 미친 눈깔이 .. 아니, 살짝 돌은 니 아빠가 - "
"아..씹 그러니까 왜!! 이유를 말하라고, 이유를!! "
CREVASS 본부에 다녀온 후 이틀째 현승은 이유없는 트집을 잡고있었다. 한번은 다리꼬고 앉아있는 자세가 불량하다며 또 한번은 숨쉴때마다 코를 심하게 벌렁인다며 아마도 그 모든게 마음이 삐뚫어져서 그런거라나?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도 못할 준이를 안고서 벌써 수십번째 갖가기 이유를 대며 트집을 잡아대는 현승때문에 준형은 정말로 돌아버리기 일보직전이였다. 결국 참지못한 준형이 진짜 이유를 대라며 큰 소리쳤고 그 소리에 오호라? 너 잘덤볐다 는 눈빛으로 기다렸다는듯 현승이 준이를 침대위에 내려놓고 부엌에서 물을 마시고있던 준형에게로 향했다.
"..그저께 머했어?"
"그저께 머 - 너 본부들어갔을때? 잠깐 외출한다고했잖아."
"그러니까 외출해서 머했냐고 - "
"외출해서 집 잠깐 들렸다가 카페에 가서 누구 좀 만나....야 ! 근대 왜 내가 이걸 다 말해야하는데!!!"
"카페에 가서 누굴만났는데~?"
"뭐야,지금? 사랑과 전쟁이라도봤냐?? 이거 완전 바람핀 남편 바가지긁는 마누라잖아!!"
준형이 스쳐지나듯 봤던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단골 아내에 빙의된것마냥 꼬치꼬치 자신의 행적을 캐묻는 현승에게 다른 남편들마냥 소리를 지르고 현승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바가지 긁는 마누라 라는 말에 화가난건가 싶어 준형이 서둘러 변명할건덕지를 찾아헤메는데 현승의 표정이 굳어버린건 바가지긁는 마누라가 아니라 바람핀 남편 이라는 말 때문이였다. 정말로 사실이 그럴지도 모르는거니까.
"....여자있다며?"
제 손으로 준형이 모르도록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린 후 내뱉은 현승의 물음에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 여자는 무슨. 나한테 여자가 어딨어! 온리 장현승 !!! 주인님만의 딸랑딸랑 눈깔 모르냐?! ] 라고 아무렇지않게 말하고싶었지만 준형은 목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장현승 말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냐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아니라고 말할수있지만 이틀전 카페에서 만난건 분명히 여자였다. 언젠가는 현승도 알게될일이였을지도모른다. 이제는 숨긴다고 숨겨지는것도 막는다고 막아지는것도 아닌 용준형의 또다른 현실이 되어지고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 여자는 - "
"됐어. 말하지마. "
"현승아 그 여자는 .."
"씨발. 한마디만 더해, 그 여자 죽는꼴보기싫으면 닥치라고."
이틀전 총감독관의 호출로 CREVASS 본부에 들어섰을때 우연찮게 요섭을 마주쳤고 의외의 말을 전해듣게되었다. 시작은 알콩달콩한 신혼을 즐기는 현승의 자랑질로 끝은 그 자랑질에 한껏달아오른 요섭의 확신할수없는 폭로로. 덕분에 카페에서 어떤 여자와 있더라는 말을 전해들었고 그저 신경이 조금 쓰였던것뿐이였다. 자신과는 다르게 누구나가 이름만 들어도 알듯한 유명한 재벌가의 하나뿐인 외 아들. 조직에서의 용준형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용준형은 사회적지위를가진 부모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였기에 자신이 모르는 준형만의 세계가 존재할거라는것을 부정하는것이 아니였다. 그저 현실세계에선 결코 이루어질수없는 자신과 준형의 한계를 새삼스럽게 깨달았을뿐. 그런데 -
"...마음에 안든다 장현승. 씨발 용준형이 뭐라고 .. 미친 눈깔새끼가 뭐라고 .. 쓰읍"
돌아오는 대답이 그래서는 안되는거였다. 돌아오는 대답은 뻔하디 뻔한 진부한 말일지언정 내게는 오직 장현승뿐이라고 무슨 여자를 말하는거냐고 여자따위는 만난적도없다고 - 그렇게 대답했어야했다. 그러면 그말을 믿고 몇번은 더 틱틱거렸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아무일도없었다는듯 제자리를 찾을수있었을거였다. 울고싶지않으려 애를 썼지만 현승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누구를 향해 내뱉는 말인지도 모르겠는 말들이 입밖으로 나오고있었다. 마음에 들지않았다. 아직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한것도 아닌데 바람피는 남편을 상대로 배신감에 치를떠는 아내처럼 거추장스럽게 눈물이 흐르고 심장이 조각조각 나뉘어져 찢겨져나가는것만같았다. 용준형이 뭐라고, 용준형 따위가 도대체 뭐라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지 현승은 의자에 걸쳐진 자켓을 집어들고 집을 나섰다. 이대로 준형을 보고있을 용기가 없었다.
"..그러니까 현승아 그 여자는 ............."
돌아서는 현승을 붙들지도 못한체 현승이 나간 자리만을 바라보던 준형이 들리지도 않을말을 읊조리고 있었다. 왜 지금껏 말을 하지않은거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대답은 한가지였다. 해결할수있을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자신이 사랑하는건 그 여자가 아니라 장현승이니 고민할 필요도없는거라고 단정지었었다. 그러니 이 사실을 현승이 알게될일은 아마 없을거라고 - 어쩌면 현승이 상처를 받을거라는 생각을 하지못했던걸지도 모른다. 말하지않는다고 마음이 전달되지않는건 아니였는데 표현에 서툰 현승의 사랑에 익숙해져 어느샌가 현승이 자신을 사랑해주는것보다 자신이 현승을 더 많이 사랑한다고 믿게되었다. 그래서 장현승은 용준형땜에 상처같은건 받지않을거라고 ‥.
후우 -
어리석은 생각이였다. 어째서였을까. 어째서 조직에서의 용준형과 현실에서의 용준형은 다른거라고 생각했을까. 둘 다 용준형 자신이였고 용준형은 이 세상에서 단 한사람 오직 장현승만을 사랑하는데 어째서 - 준형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쥔체 벽에 기대어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거짓일지언정 나누어 갖지 못할정도로 준형과 현승은 본인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서로를 사랑하고있음을,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아픈것인지를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용준형입니다. 좀 만나죠."
벽에 기대어 숨을 가다듬던 준형이 휴대폰을 꺼내어들고 통화기록에 찍힌 낯선 이름을 눌렀다. 신호음이 울리고 수화기너머 올곧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을때 준형이 말했다. 그리고 해야할말이 있었을뿐 들을말은 없다는듯 곧 휴대폰의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짧은 통화가 끝나고 준형은 서둘러 나갈 준비를했다. 현승이를 위해서라도 오늘은 꼭 끝을내야했다.
*
"의뢰인은 정혜주. 26살. 직업은 시나리오작가. 의뢰내용이 .. 스토커퇴치? 맞으신가요? "
자신이 첫번째 의뢰인으로 왔었던 크레파스 흥신소 사무실. 기광이 마주앉아 있는 의뢰인을 바라보며 의뢰서식을 확인하고있었다. 스토커퇴치를 의뢰한 의뢰인답게 그녀는 한 눈에봐도 예쁘장한 외모에 펌이 들어간 귀여운 단발을 하고있었다. 의뢰를 부탁한게 사흘전이고 지난 사흘간 스토커로부터 의뢰인을 지킬겸 드러나지않게 스토커의 모습과 스토커 형태를 분석할겸 의뢰인의 뒤를 살짝 밟았고 오늘은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실행안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아주 구체적이게는 하지않을생각이지만.
"1차적으로 의뢰안을 실행하기전 상담과 조사만으로도 일정금액의 페이를 받습니다만 내일 정식으로 스토커퇴치안을 실행으로 옮기시게되면 2차적으로 페이를 납부해주셔야합니다. 물론 성공시 약간의 보수금도 지불해주셔야하구요. 그래도 진행하시겠습니까?"
"사인..하면되나요?"
보수에 관한 이야기에 그녀의 표정은 좋지않게 일그러졌지만 세상에 공짜없으니 당연히 해야할말이였고 당연히 받아야하는 댓가였으므로 기광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억지로 쥐어짜냈지만 전혀 어색하지않게 웃어보였다. 사인을 마친 그녀가 구체적인 계획안에 대해 듣고싶은지 무언가 바라는듯한 얼굴로 기광을 바라보았고 기광은 들고있던 서류를 그녀에게 내밀며 말을 이어나갔다.
"혜주씨가 해주실 일은 간단합니다. 그저 늘 하시던데로 일상을 즐기시면되는거죠. 그럼 나머지는 저희가 다 알아서해드리겠습니다. 기한은 내일 하루. 단 하루면 아마 깨끗하게 퇴치가능하실겁니다. 다만 계약이 성립된이상 중도 파기를 하시더라도 페이는 돌려드리지않습니다. "
기광의 말이 만족스러운지 그녀는 붉게칠해진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곤 모기가 친구하자고 달려들것같은 콧소리로 인사를 남기곤 짧은 치마에 드러난 각선미를 자랑하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기광은 마지막까지 미소를 잃지않으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주머니에 쑤셔넣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PM. 6:25
함께있던 동운에게 저녁은 초밥을 먹는게 어떠냐며 사무실을 나갈수없으니 자신이 고객을 상담하고 동운이 사오는걸로 이야기를 끝내고 동운이 나간지 20여분쯤 지난듯했다. 기광은 혹시라도 동운이 오고있는것은 아닌지 목을 쭉 빼고 문 주위를 살피다 빠르게 컴퓨터로 문자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시간상으로 문자를 보내기에 아마도 꽤나 적절한 시간일것이다. 기광은 자신이 작성한 문자를 확인한후 전송했고 전송이 된것을 확인한후 IP 추적을 하지못하도록 흔적을 없애기 시작했다.
[...떨어져]
모니터에 작성된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삭제하고 기광은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후우.. 깊은 한숨이 베어나오고 눈 앞이 희미해지는것만 같았다. 기다려줄 시간이 많지않으니 제발 알아서 사라져주기를 - 조용히 끝낼수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끝내고싶은 일이였다.
:)03
어쩌면 이 사탕의 주인은 이제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투니버스 TV를 즐겨보고 뽀로로와 뿡뿡이를 사랑하고 짱구를 동경하던 아기광은 이제 없을지도 모른다. … 그렇다면 지금 눈 앞에 있는건 누구인걸까. 내 품에 안기어 칭얼대며 잠이들고 달콤한 케익향에 새초롬한 입술을 달싹이던 작은 손짓하나 표정하나에 손동운에게 천국과 지옥을 선물했던 손동운의 달콤한 아가는 정말 세상에 존재하지않았던걸까. 아니, 이번엔 니가 틀렸어. 이기광이 무슨말을해도 나는 다 믿었을건데 그런데 ‥ 이건 아냐, 이건 틀렸어, 기광아 난 아직도 네 작은 손짓하나 표정하나에 숨이막혀. 1분1초 살아숨쉬는것조차 힘에겨워서 겨우겨우 쥐어짜내듯 쉬어졌던 숨이 나를 향하는 네 차가운 표정에도 좋다고 뛰어. 언제그랬냐는듯 심장에 바람이 세어들어와서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네 뒷모습에도 미친듯이 뛰는 심장이 네가 틀렸대. 너는 공격수 이기광이기전에 손동운의 달콤한 아기광이고 결코 헤어나올수없는 깊은 사막이니까. 그러니까 한번만 웃어줘 ‥ 네 웃음이면 나 비틀린체 꽉 막혀버린 숨통이 좀 트일것같아.
*
[찰칵 -]
셔터음이 경쾌하게 허공에 울리우고 기광은 제대로 사진이 찍혀졌는지를 확인하게위해 카메라를 들여다보았다. OK - 이제 슬슬가볼까. [찰칵 - ] 사진의 확인을 마친 후 본격적인 크레파스 흥신소의 세번째 고객 정혜주의 의뢰를 처리하기위해 이동하려는데 기광의 귓가로 둔탁한 셔터음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본곳에는 역시나 - 아닌척하려 카메라를 등뒤로 감추고 아무것도 없는 먼산을 어색하게 응시하는 손동운이 있었다. [줘봐요,이리 -] 기광이 손을 내밀며 카메라를 달라고하자 [카카..카메라..라니? ..무무무무슨 말 하는거야 하하..] 라며 지나가는 유딩도 알아챌 거짓말을 해대는 동운이였다. 휴우 혀끝에 멤돌다 허공으로 기광이 한숨을 내뱉으며 카메라를 받기위해 내밀어진 손을 거두었다. 말린다고한들 말려질일이 아니였으며 멈추라고한들 멈춰질일이 아니였다. 벌써 일주일째 손동운은 귀를 막고 눈을 가린체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이기광의 존재를 부정하고있었으니까.
[찰칵] 자신의 앞에서 기광의 손이 거두어지자 동운의 입꼬리가 가벼웁게 올라가며 등뒤로 숨겨둔 카메라를 서둘러 꺼내어들고자신에게서 등을돌려 발걸음을 옮기려는 기광을 담기위해 셔터를 눌렀다. 기광이 사라졌을때 가장 크게 후회했던건 역시 사진을 찍어두지않은일이였다. 함께찍은 사진한장이라도 있었더라면 모두가 하는 말도안되는 거짓말을 반박할수있었을텐데 -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동운의 심장을 뒤흔들고 동운은 차곡차곡 추억을 쌓아가는 사람마냥 목적지에 도착할때까지 열심히도 셔터를 눌렀다. 햇살이 기광의 머리위로 내려앉고 빛에 반사된 기광의 뒷모습은 언제나 그랬었지만 정말이지 천사같았다. 날개를 달고 날아가지못하도록 날개를 부러뜨려 영원히 곁에 두고싶을만큼 아름다운 천사 - 동운은 손에 든 카메라를 내리고 무언가에 홀린듯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기광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베시시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겨우 뒷모습하나인데도 좋다,너무 -
"그러니까 절 도와주시겠다구요? 왜요?"
"싫으시면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아뇨,, 싫다는게 아니라,, 그 ..그 사진은 먼데요?"
"보시겠습니까? 후회하실지도 모르는데 - "
예쁜 화분들이 발코니를 수놓은 엔틱한 작은 카페에 도착한 기광이 미리 자신을 기다리고있던 마르고 순박해보이는 사내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옆으로 기광의 뒷모습에 침흘리다 늦어버린 동운이 앉고 사내는 기다렸다는듯 묻고싶었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기광과 동운이 만나고있는 사내는 의뢰인 정혜주를 스토킹하고있다는 스토커였다. 깨어있는 순간부터 잠이드는 순간까지 쫒아다니며 자신을 감시하고있다고 그녀는 주장했지만 조사에 따르면 사내는 스토커의 수준까지는 아니였다. 그녀가 좋아 몇번 쫒아간적은 있는것같으나 그녀가 증언한대로 깨어있는 순간부터 잠이드는 순간까지는 아니라는거다. 시간 나면 종종쯤이 적당하지않을까? 어찌되었든 의뢰는 의뢰이고 보수도 입금이 되었으니 기광은 준비해왔던 사진을 꺼내들고 사내의 앞으로 내밀었다. 사내는 약간의 의심이 섞여있는 눈빛으로 기광과 동운을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연모해마지않는 여인의 사진을 보고싶다는 유혹을 참아내지못하곤 떨리우는 손으로 사진을 받아들었다.
"어떠십니까? 후회 ‥ 하십니까?"
사내에게 내밀어진 사진들은 기광이 이른 새벽부터 방금전까지 그녀를 따라다니며 찍은 사진들이였다. 그가 바라보면 실망할수있을만큼 전혀 아름답지못한모습들로 예를 들면 감지않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고 무릎이 나간 추리닝을 입은체 다리털을 민다던가 혹은 다리를 벅벅 긁어댄다던가. 눈이 아주 작아보인다는 돋보기안경을 쓰고 코를 파고있다던가 하는 뭐 그런 종류의 약간은 추잡하고 더러운 사진들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결코 절대 보고싶지않은 모습들을 담고있는 사진들을 지금 사내가 받아들고 떨리우는 손을 주체하지못한체 바라보고있었다. 사랑이라는건 결국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자신이 알고있는 모습이 사랑하는 사람의 전부가 아님을 알면서도 사랑하고싶은 상대의 모습만 기억하고 기억하고싶지않은 모습은 외면해버리는것. 마치 예전의 자신만을 기억하는 지금의 동운처럼 -
"..이..이..이럴리가없어요!! 얼마나 예쁜사람인데 - "
"아름다운 분이시죠. 하지만 이 모습 역시 정혜주씨입니다. 직접 확인해보시겠습니까? 도와드릴수있는데."
자신이 생각했던것과는 전혀 다른 사진속 그녀의 모습에 사내는 적잖이 당황한듯보였지만 곧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럴리가없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이 이런 모습을 하고있을리가없다. 기광은 사내에게 다음말을 건네며 들키지않게 자신의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있는 동운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동운은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이기광을 자신의 품에서 칭얼대며 잠이들었떤 달콤한 아가로 믿고있는걸까. 그럴리가없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면서‥. 기광의 질문에 사내는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하지못했다. 그저 한낱 사진일뿐이였다. 악의적으로 찍을수도있는 한낱 사진인거였다. 그러니 실제의 그녀는 사진과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사내의 내면에 자리잡고있어서였을까. 결국 자신이 없었던거였다. 보고싶지앟은 진짜 그녀의 모습과 마주할 자신이, 마주하고도 그녀를 사랑해줄 자신이 사내에게는 없었던거였다. 사랑이란 참 우습지 않은가 -
"그래서 사랑하지않으시나요?"
이대로 일어날 참이였다.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내는 아마 그녀의 앞에 한동안은 나타나지않을것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모습과 다른 그녀와 마주할 용기가 사내에게는 없으니까. 기광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의뢰인이였던 그녀에게 의뢰가 잘 처리되었다 보고를 할 참이였다. 그 순간 기광의 귓가로 의외의 질문이 들려왔다. 질문의 주인은 대답을 기다리듯 진지한 얼굴로 탁자에 상체를 기울인체 사내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고있는 동운이였다. 생각지도못했던 질문에 기광은 고개륻 돌려 동운을 바라보았다. 한치의 흐트러짐도없이 사내를 향해있는 동운의 진지함이 서려있는 눈빛에서 알수없는 간절함이 베어나오고있었다.
"사랑하지않으시냐 물었습니다."
"..네? ..저는...그러니까..전........"
"변할수있을리가 없습니다. 사랑하지않을수있을리가없다는 말입니다."
동운의 볼을타고 어째서 눈물이 흐르고있는지 이유를 알수가없었다. 그저 기광은 갑작스러운 동운의 행동에 넋이나간듯 바라보고있을뿐이였다. 동운은 자신의 볼을 타고 거추장스럽게 흐르는 눈물을 오른쪽 손을 들어 투박하게 닦아내더니 원망에 가까운 눈빛으로 다시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랑이 변할수있을리가없다 - 그런데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사내가 사랑이라고 말하지않는다. 자신이 사랑했던 모습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있었지만 그 모습마저도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하지않는다. 그게 너무도 화가나서, 믿겨지지가않아서 동운은 사내의 멱살이라도 잡고 틀린거라고말해주고싶었다. 하지만 역시 그보단 -
"변하지않았어. 사랑하고있단말야. 반년전에도 떨어진 반년동안도 그리고 지금도 사랑한다고...이기광.."
"...........갑자기 무슨 - "
"웃어주지않아도 좋아. 화를 내도 좋고 차갑게 뒤돌아서도 좋아. 아기광이 아니라 공격수 이기광이여도 좋다고 난 - "
"................"
"사랑해. 내가 모르는 이기광의 모습까지도 다 .. 다 사랑해..."
말을해주어야지싶었다. 품에 쏘옥 안기어 해맑게 웃음지었던 아기광을 사랑했던 손동운이 반년이 지나도 사랑을 고백하는건 그때의 이기광을 잊지못해서가아니라 지금의 이기광역시 사랑하기때문이라고 - 어느새 뺨위로 닦아내지못한 눈물이 번지고 동운은 그대로 자신의 옆에 앉아 어찌할줄을 모르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기광을 끌어안았다. 동운의 품에 안겨 기광은 떨리우는 손을 조심스레 들어올려 동운의 등에 가져다대었다. 동운이 들려준 따스한 말만큼이나 따뜻한 온기가 가득했다. 토닥토닥 - 조심스럽게 동운의 등을 토닥이며 기광은 눈을 감았다. 기광의 입술에 옅게 웃음이 번져나가고 이기광의 모든것을 사랑한다는 동운의 고백이 메아리처럼 기광의 귓가에 울려퍼졌다. 처음 이기광이 손동운에게 들려주었던 [멋있다]는 말이 마법처럼 스며들었듯 동운이 기광에게 들려준 [여전히 이기광의 모든것을 사랑한다] 는 말이 마법처럼 기광의 심장에 스며들었다.
함께 걷고싶었던 거리에 벚꽃이 휘날리고 따스한 온기를 담은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왔을때, 이기광이 손동운의 곁을 떠난지 179일의 시간이 흘렀을때 그제서야 알았다. 이기광이 손동운을 떠난 이유는 손동운을 위해서가 아니였다는걸. [나는 너의 아버지를 죽였어. 그래도 날 사랑해?] [손동운앞에서 5살짜리 어린 아기광은 모두다 연극이였는데, 공격수 이기광은 복수에 눈이 먼 추악하고 더러운 사람인데 그래도, 그래도 날 … 사랑해?] 겁이나서였다. 이기광의 진짜 모습을 보면 손동운이 이기광을 사랑할수없을까봐, 결국 너에게서 버려질까봐 미치도록 두려웠다. 너를 위해서라고 잘 포장된 이유는 결국 너에게서 도망치기위한 비겁한 변명이였다. 깨달았을땐 이미 너를 떠난 후였고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있었다. 그렇지만 꼭 묻고싶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광을 사랑해줄수있겠느냐고 ‥.
[공격수 이기광입니다] 라고 스스로를 소개했을때도 그 이후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을때도 반년전의 사라진 아기광을 다루듯이 어르고 달래는 손동운을 보면서 그럴수없는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네가 보여준 사랑은 진짜 이기광의 것이아니라 5살짜리 아기광의 것이였다고 - [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럽고 타락한 이기광의 모습을 사랑해줄순없는거냐고 ] 건네보지도못한 질문에 그럴수없다는 대답을 들은것마냥 심장이 찢겨져나가는듯 아팠다. 그런데 변하지‥않았다고했다. 여전히 이기광을 사랑하고있다고, 어떤 모습이여도 사랑할수있다고 , 찢겨진 심장을 감싸주는 따스한 그 말에 마녀가 걸어놓은 지독한 마법이 풀리듯 온몸이 나른해졌다. 이대로 너무도 다정한 동운의 품에 안겨 잠이들어도 좋을만큼 기광이 너무도 기다려왔던 달콤한 시간이였다. 아마도 지금 동운의 품에 안겨 금방이라도 잠이들 기세로 새근새근 예쁘게도 웃음짓는 기광은 동운이 몹시도 사랑했던 아기광일것이다. 이것이 복수에 눈이 멀어 끝없이 타락하던 이기광을 맑고 순한 병아리로 만들수있는 오직 한 사람 손동운이 만들어낸 기적같은 마법이였다.
*
"여긴어떻게 ‥"
[새삼스럽게 뭘 그리놀라요, 못볼거 본 사람처럼 -]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준형의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허무하리만큼 자연스러웠다. 마치 절대로 마주칠수없는 이 공간에서 매일매일을 봐온 사람처럼 아무렇지않게 말하는 그녀때문에 준형의 미간이 기분나쁘게 일그러지고있었다.
"다시한번묻죠.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겁니까."
"CREVASS 라죠? 아 , 이 조직이름말이예요. 빙하와 빙하사이 영원히 헤어나올수없을정도로 깊은 골짜기라 - 멋있네요."
짧은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다리를 꼬고앉은 그녀의 힐이 빛에 반사되고 자신의 눈 앞에서 귀신이라도본듯 하얗게 질린 준형이 귀엽다는듯 그녀는 짙은 퍼플색이 감도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올렸다. 준형은 지끈거리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지금 눈 앞에서 테이블에 얹은 손을 턱에 괴고 묘한 시선으로 준형을 바라보는 그녀는 분명 한달전 쯤 호텔에서 마주했던 참하고 수수했던 그녀였지만 분명히 달랐다. 호텔에서본 그녀는 아니, 불과 어제 카페에서 마주앉아있었던 그녀는 붉은 미니스커트와 퍼플색의 립스틱이 어울리지않는 무채색의 수수한 여자였다. 하지만 지금 준형의 눈 앞에 있는 그녀는 진한 아이라인에 퍼플색의 립스틱 가슴이 드러나는 타이트한 상의에 붉은빛이 감도는 짧은 미니스커트가 무척이나 잘어울리는 동일인물이라고는 감히 상상할수없는 모습이였다. 거기다가 이런곳에서 마주칠줄은 꿈에도 -
"이정도로 놀라실줄은 몰랐는데 - 이봐요, 용준형씨. 따지고보면 놀라울거없는일아니겠어요? 그쪽이나 나나 죽을듯이 사랑해서 만나는 사이도 아닌데, 이정도 가식쯤 당연한거아닌가 - "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준형이 이해가 되지않는다는듯 잘정돈된 눈썹을 찌푸리며 짙은 퍼플빛의 입술을 달싹였다. 한달전쯤 호텔에서 그녀를 만난 이유는 이름있는 가문에서 흔히들 한다는 전략적인 결혼때문이였다. 가문과 명예 그리고 사업을 위해서는 함께 성장해나갈수있는 최고의 파트너가 필요했고 고르고 골라 선정된 최고의 파트너의 단 하나뿐인 외동딸이 지금 눈 앞에 있는 그녀였다. 일주일뒤쯤 약혼을 할 예정이였고 한달여쯤 지나선 아마 결혼식이 이루어질 예정이였다. 마치 미리 예정되어있던 일처럼 한치의 오차도없이 진행되고있던 이 혼담을 준형이 딱히 거절해야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의 말처럼 죽을듯이 사랑해서 만나는 사이도 아니고 사랑이 필요한 사이는 더더욱 아니였다. 그저 호적상 남편과 아내로서 묶여지고 모든 재산과 사업을 이어갈 아이 한명쯤을 낳아주면 되는거였다. 그 상대가 누구였든 아마 상관이 없었을거였다. 아무 의미없는 결혼이였으니까. 이러한 일들이 준형과 그녀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그리 특별할것도 없는 일이였다. 그래서 그것이 함께하고있는 현승에게 독이될줄 차마 몰랐던거였다.
"..이름이 진..."
"유진희요."
"아..유진희씨. 제가 궁금한건 그쪽이 입고있는 차림새가 아니라 왜 이곳에 와있느냐하는겁니다."
어제까지 봐오던 그녀와 전혀 다른느낌인 눈앞에 있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하지않았던것은 아니였지만 준형이 그녀에게 듣고싶은 대답은 벌써 세번째로 묻고있는 바로 이 질문이였다. 그녀가 도대체 왜 함부로 들어설수없는 이곳에 있는지 - 이해할수도 없지만 일어날수도없는일이 눈 앞에 펼쳐지고있었다. 그녀와 준형이 마주앉아있는 이곳은 그녀가 절대 들어올수없는 CREVASS 의 작전본부 그 속에서도 공격수 준형의 개인룸안이였다.
[ 이름도 기억못하는 약혼자라 … 재미있네요. ] 준형이 건넨 질문에 대한 대답대신 그녀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못하는 무심한 남자가 자신의 남편이 된다는것이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준형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묘하게 말아올렸다. [ .. 제가 알아보도록하죠.] 자신의 질문을 무시한체 그녀가 흘리는 웃음에 준형의 미간이 짜증스럽게 구겨지고 더 이상 대답을 기다리는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준형은 그녀를 마주하고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녀가 편하게 나갈수있도록 문을 열어주려는 친절함이 담긴 매너는 아니였다. 그저 빨리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져주었으면하는 바람에서였다. 차라리 가식이라 할지언정 무채색의 수수했던 그녀가 나았다. 그때는 적어도 지금처럼 짜증이 솟구치지는 않았으니까.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시네요. 아버님께서 왜 저를 보내셨나했더니 이제 좀 이해가 가네요. 용준형씨 그 참을성없는 성격때문에 제가 필요했던모양이죠? 뭐, 귀엽긴하네요 어린아이같은게 - "
"...지금 뭐라고 하시는겁니까. 좀 알아듣게 - "
"공격수 ‥ 라죠? 설마 그쪽 아버님이 정말 모른다고 생각한건 아니죠?"
"...........적당히 하시죠. 예의를 지키는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 "
"쿡.. 귀여워라. 예의를 지키지않으면 어떤 모습일까? 죽일건가요, 날?"
"원하신다면 - "
"죽기 싫으면 진실을 말해야겠네요? 무섭기도해라 ~ 그럼 잘들어요, 용준형씨. 이곳이 그쪽이 공격수로 활동하고있는 조직이고 부업으로 흥신소하나를 경영하고있다죠? 그리고 요즘은 ‥"
세계적인 자산가들의 뒤통수를 치고계시다고 - 그녀의 마지막 말이 준형의 귓가에 늘어지듯 울려퍼지고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정리도 되어지지않은체 준형의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자신이 들려준 이야기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못한체 그저 반쯤 넋이나간 표정으로 문을 열기위한 보안키위에 손을 얹은체 위태롭게 서있는 준형을 바라보며 그녀는 천천히 준형의 가까이로 향했다. 세계적인 자산가 아버지를 둔 아들이 세계적인 자산가들의 뒤통수를 친다 , 역설적이고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묘한 웃음을 흘리며 준형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올려진 손은 셔츠 깃을 어루만지다 얄쌍하게 빠진 넥타이로 내려오고 짙은 푸른빛의 넥타이를 어루만지며 그녀는 고개를 들어 준형의 눈을 바라보았다.
"‥ 얼마나 죽였어요? 꽤나 어릴때부터 활동했다던데 그럼 한 백명쯤되려나 .. "
"..........."
"어때요? 죽이는 느낌말이예요. 쾌감 머 이런건가? 끊임없이 죽이는거보면 살인이라는거 꽤나 재미있는가보죠?"
"............"
"그럼 이건어떨까요? 적으로 다시 만난 아버지와 아들, 아들 아버지를 겨누다. 맘에 들어요?"
핏 -
참지못한 손이 반사적으로 총을 꺼내어 들었고 총알은 이미 나간 후였다. 총알이 스쳐간 그녀의 팔에서 붉은피가 탐스럽게 세어나오고있었다. 살이 찢겨져나가는 고통이 꽤나 심했을텐데도 그녀는 소리를 지르지않았다. 그저 살짝 찌푸려진 미간 아래로 안타까움에 가까운 눈빛이 눈앞에 있는 준형을 응시하고있었고 살짝 벌려진 입술사이로 얕은 숨이 세어나오고있었다. 충동에 의한 저격이였다. 그녀를 죽이기위한것도 아니였고 상처를 내기위한것도 아니였다. 그저 그녀가 들려주는 말들을 믿을수가없었고 그 말들이 가져다주는 알수없는 공포가 무서웠을뿐이였다. 총을 쥔 준형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숨쉬기가 곤란한듯 거칠게 가뿐 숨을 몰아쉬고있었다.
"정말로 어리네요, 용준형씨. 자기가 하는일이 자기 아버지 목을 조여오는 일이라는걸 정말 몰랐다는거예요?"
자상한 아버지였다. 세계적인 기업의 회장이였고 전 세계에 세워진 기업의 계열사만으로도 수십개가 넘어서고있었다. 그것이 모두 아버지가 이루어낸 업적이였고 이루어가고있는 역사였다. 준형은 그토록 위대하고 자상한 아버지의 아들이였고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였으며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CREVASS 의 공격수였다. 또한 지금은 세계적인 자산가들의 뒤통수를 치고있는 조직의 공격수이기도했으며 흥신소의 상담원이기도했다. 그런데 왜 몰랐을까 - 자신의 아버지역시 세계적인 자산가였음을 그것도 상위 1%에 속하는 타겟으로 노리기엔 꽤나 적합한 사람이였다는것을말이다. 준형은 총을 쥐고있는 손을 제 머리로 올려 감싸쥐고는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내질렀다. 어리석었다. 피아니스트 용준형도 공격수 용준형도 모두 지킬수있을거라는 근거없는 확신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걸까. 미치도록 사랑하는 현승을 곁에 두고도 그녀와 결혼하려고했던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였음을 왜 이제서야 알게된걸까.
"인사가 늦었네요. GK의 책임자 유진희입니다. 새로설정하신타겟에 관한 이야기를 논의하려고왔는데 오늘은 곤란하겠군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도록하죠."
그녀는 한쪽팔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자신이 걸치고온 자켓으로 둘러막고 힘없이 벽에 기대어선체 가쁜숨을 몰아쉬는 준형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며 말했다. 지금 좀 만나자는 준형의 전화에 그녀가 약속장소를 이곳으로 잡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더 늦기전에 준형이 자신이 몸담고있는 현실을 정확히 파악해야했고 그 편이 그녀가 일을 진행하는데있어 조금더 수월하기때문이기도했다. 아마 그의 아버지가 원했던것도 이것이 아니였을까. 세상이 어떤지도 모르고 자기 좋은것만해대는 어린아이같은 아들에게 세상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보여주는것 그리고 이것이 그의 아버지가 걸어왔고 또한 그가 걸어가야할 세상임을 알려주는것 - 아마도 믿기힘든 사실을 받아들이지못한체 떨고있는 이 남자에게는 너무도 버겁고 잔인한 사실이겠지만.
"아. 예쁘더군요, 여자인내가봐도 질투가 날만큼. 그쪽 애인이라죠, 아마 - "
또각또각 - 복도에 울려퍼지는 그녀의 발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져갈때 준형의 귓가에는 그녀가 남기고간 마지막말만이 메아리처럼 울려퍼지고있었다. 예쁘더군요‥ 단 한순간도 그립지않았던적은없었지만. 심장이 뛰고있는 1분 1초가 장현승을 향한 그리움으로 가득차서 장현승이라는 사람은 용준형에게있어 매일 숨이찰정도로 벅찰만큼 사랑스런 사람이였지만 지금만큼 , 지금 이 순간만큼 심장이 저리도록 그리웠던적은 처음이였다. 말할수있을것같은데 부끄러워서 하지못했던말들, 서툴러서 하지못했던말들, 마음은 그렇지않은데 틱틱거리면서 끝내 하지못했던 말들 지금이라면 다 할수있을것같은데 -
보고싶어. 네가 미치도록 보고싶어, 현승아 ‥
*
"결혼해,나랑"
툭하고 서류봉투하나가 크레파스 흥신소의 의뢰서식안을 보고있는 두준의 책상위로 경쾌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리고 곧 귓가에 다시 한번 간지럽게 울려퍼지는 소리 [결혼해!] 앵무새 마냥 무한 재생되어지고있는 요섭의 귀여운 청혼이였다. 두준은 요섭을 향해 싱긋 한번 웃어보인후 가벼웁게 청혼을 무시한체 서류봉투를 열어보았다. 봉투안의 내용을 찬찬히 읽어내려가는 두준의 시선이 건조함에서 놀라움으로 바뀌어가고있을때 자신의 승리를 확인한듯 작게 브이를 그리며 요섭의 입가에 아침햇살마냥 싱그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어떻게 한거야?"
"여보, 하나뿐인 피앙새를 그렇게 무시하면 안되지, 내가 이래뵈도 천재랬잖앙!!! "
피..피앙새? 이제는 스스로를 피앙새 (PIANCE : 약혼자) 라고 칭하는 요섭을 바라보며 결코 주도권을 뺏기지않으려는 새신랑마냥 두준이 어색하게 웃음지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한거야?] 정말로 궁금해서이기도했고 살짝 말을 돌리려는 마음도 없지않아 있었던 두준의 질문이 이어지고 요섭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뿔테안경 하나를 꺼내어 급하게 쓰고선 사립탐정에 빙의된듯 날카롭고 예리고도 도도한 시선으로 두준을 바라보았다.
"흠흠, 그러니까 말이지, 내가 - "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깃털달린 볼펜하나를 꺼내들고서 요섭이 들려주었던 이야기중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심리' 라고했다. 우리가 찾아야하는 타겟은 프랑스계 세계 상위6% 안에 드는 자산가 제인이였고 현재 제인은 스스로의 신분을 철저히 숨긴체 대리인을 내세워 모든 업무를 처리하고있는중이였다. 그 대리인마저도 하나가 아닌 여럿이였고 때문에 추려진 타겟의 후보도 여러명이였다. 가지고있는건 그들의 최근행적뿐인 이 상황에서 요섭이 사용한 방법은 행적의 역 추적이였고 사람의 내면 깊숙히 자리잡은 [불안심리] 였다.
일찍이 끝내두었던 계좌추적에서의 실 계좌는 G : 12 ( GERMANY / 은행코드 ) 였으나 타겟의 후보로 추려진 그 누구도 이 계좌로 접근한 사람은 없었다. 펀드나 투자로 이어지는 그녀의 재산은 실제로 그녀가 가진 재산의 20%도 안되는것들이였고 감히 측정도 불가능할만큼의 금액들이 관리되어지는 계좌는 G:12 였음에도 관리하는하는 이가 아무도없다니 이상할노릇이였다. 정확한 정보를 위해 그들이 사용하는 휴대폰의 전산망을 해킹해 위성 GPS 로 위치 및 이동경로를 파악했고 근처에 설치된 무인카메라를 통해 그들의 모습과 접촉하는 상대를 확인할수있었다. 물론 무인카메라의 확인은 각국에 위치한 각도시의 서버를 해킹한 결과물이였다.
결과는 비교적 단순했다. 자잘한 자산들은 후보 4명 모두의 의해 관리가 되어지고있었고 그중에서도 유난히 여유로운 모습으로 타인과의 접촉을 서슴치않는 이가 하나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24번째 타겟 제인이였다. 제인의 의해 고용된 이들은 제인의 목숨을 노리는 CREVASS로부터 제인을 보호하기 위해 가짜 제인행세를 하는것이 목적이였고 그말은 즉 언제든 그들은 제인대신 목숨을 빼앗겨야할 타겟이 될수도있다는말이였다. 그것을 알고있으면서도 왜 그녀를 대신하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수없었지만 내면깊은곳에 자리잡고있는 불안함을 감출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있는 공간을 벗어나게되면 위험에 처하지않을까하는 불안감으로인해 모든 업무를 집에서만 처리하고있었으며 그들은 모두 잠깐의 외출도 하지않았다. 네 명중 자유롭게 외출을 한 이는 자신대신 죽을 사람들을 고용해놓았다는사실에 몹시도 여유로웠던 제인뿐.
그리고 또 하나. 제인은 그 누구에게도 실계좌의 관리를 맡기지않았다. 자신을 대신해 죽어줄 사람은 필요하지만 진짜 중요한걸 맡기기엔 그들을 신뢰하지못해서였을까. 그녀는 지난 몇 일간 외출을 통해 자신의 재산을 지금껏 관리해주던 그녀가 믿고 맡길수있는 자산가를 만나 실계좌를 관리해왔었다. 그녀가 접촉한 사람은 단 한명 세계적인 자산가들의 자산을 관리하고있다는 실력있는 자산가 마틴이였다. 말을마친 요섭은 전쟁에 승리를 거두고 온 장군처럼 승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 잘했네, 우리 요섭이 ] 부드러움을 끼얹은 나즈막한 두준의 말이 요섭의 귓가를 간지럽히고 크고 듬직한 두준의 손이 잔뜩 힘이 들어간 요섭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상냥한 손길에 언제그랬냐는듯 요섭의 어깨가 나른하게 풀리고 마치 처음 사랑에 빠지듯 두준에게 푹 빠진 요섭의 두 눈이 초승달을 그리며 예쁘게 휘어졌다.
"결혼할거지, 나랑?"
작은 꼬마가 칭얼거리듯 요섭이 두준의 품에 쏙 안기며 제 머리가 닿아있는 가슴에 얼굴을 묻고선 말했다. 몇일째 듣고있는 그말에 대한 대답대신 요섭을 제 품에서 떼어내곤 두준은 허리를 숙여 자신의 입술을 요섭의 이마에 가져다대었다. 이마에 퍼져나가는 간질거리는 느낌때문에 요섭의 눈이 질끈감겨지고 그 모습에 피식 두준의 입가로 웃음이 세어나왔다.
어디서 부터 말하면 좋을까 , 윤두준을 웃고 울리는 넘치게 귀여운 이 꼬맹이에게 -
뭐라고 말해야 이해할수가있을까, 이해할수있는일이기는한걸까.
그래도 말해야하는거겠지? 햇살을 닮은 동그란 두 눈으로 날 바라보고있는너에게 -
윤두준이 왜 무척이나 사랑하고있는 양요섭과 결혼이라는걸 할수없는건지 ‥
[요섭아 , 너를 만나기전 나를 웃게하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사람뿐이였어.]
-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04
소복소복 내려오는 눈이 그리 두껍지않은 외투위로 쌓이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위에 길 잃은 아이마냥 얼어붙은 손을 꼭 쥐고서 결코 들어설수없는 커다란 대문앞을 몇시간이고 서성였었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축복을 가득담은 캐롤이 도심에 울려퍼지고 행복을 담고있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조화롭게 섞여서 세상은 온통 축제로 즐거워보였지. 아마도 그때가 크리스마스 이브였던가봐. 크리스마스 이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달콤한 그날에 고작 10살이였던 내게 주어진건 귓가에 스치우는 스산한 바람 한조각과 짙게 깔리우는 어둠뿐이였지. 그때였어. 힘없이 걸음질을 반복하던 다리에 힘이풀리고 차가운 한기가 온몸에 스며들어서 이대로 얼어붙는건 아닌가 싶을정도로 떨고있을때 내가 결코 들어설수없는 커다란 대문을 열고선 그 아이가 나타났어.
그 아이는 나를 버리고 돌아선 내 아버지의 아들이였고 내 아버지를 홀릴만큼 아름다웠던 그녀의 아들이였으며 내 하나뿐인 동생이였어. 나는 아버지가 나를 버린뒤로 매일매일 내게서 하나뿐인 아버지를 빼앗아간 그 아이가 미치도록 미웠었는데 그때 영원히 열리지않을것같았던 문을 열고 달려와 그 작은 손으로 나를 꼬옥 끌어안은 이 아이는 이상하게 밉지가 않았어. 보고있으면 눈이 부셔서 이대로 눈이머는게 아닌가 착각할만큼 존재만으로도 빛이나는 그 아이가 얼어붙은 내 품으로 달려와 안겼을때 나는 햇살을 끌어안은것마냥 너무도 따뜻해서 밉기는커녕 오히려 눈물이 났어. 그 아이는 끝없이 펼쳐진 설원위에 버려진 날 녹여주는 단 하나뿐인 온기였거든. 아마도 그때부터였나봐. 그 아이가 내 손을 붙들고 나는 결코 꿈조차 꿀수없었던 커다란 대문을 넘어섰을때 대문안에있는 아늑한 집과 불러본적없는 상냥한 엄마와 나를 버렸지만 난 평생 그리워했었던 아빠를 갖게 해주었을때, 그렇게 자신이 누리고있던 모든것들을 내게 주면서도 형이 생겨 좋다며 내 앞에서 해맑게도 웃어보였을때 -
성냥팔이소녀가 성냥에 불을 붙이면 나타난다는 환상처럼
사막을 걷는 사람이 간절하게 기도하면 보인다는 신기루처럼
부질없는 내 가련한 착각속으로 그 아이가 들어왔어.
요섭아 , 그때는 몰랐는데 아마도 그걸 '사랑' 이라고 부르는가봐.
*
두준의 혀끝에서 힘없이 뱉어진 웃음이 공허한 허공에 멤돌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최대한 담담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으려했지만 마치 추억에 젖어 지나간 옛일을 들추어내는 사람마냥 젖어버린 두 눈을 들킬까봐 두준은 자신을 향한 요섭의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기광과 처음만났던 순간은 소중한 보물을 숨겨놓듯 예쁘게 포장되어 기억속 깊숙히 묻어져있었다. 너무도 따뜻했던 그 기억위로 끔찍하리만치 떠올리고싶지않은 피로 번져간 기억의 조각들이 덮어지고 그 이후로 오랫동안 꺼내어보지않았었더랬다. 두준에게있어 가장 행복한 기억이였지만 동시에 가장 아픈기억이였으며 그 행복한 기억을 꺼내려면 그 위에 얹어진 끔찍한 기억들을 들추어내야만했으니까.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현기증에 두준은 뒤에 놓여진 책상에 손을 얹어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하다 곧 조심스럽게 몸을 기대었다. 기억을 입에 담는다는건 생각했던것보다 힘이든일이였다. 기억을 들추어내는것만으로도 서있을수없을만큼 현기증이 밀려오는데 한자한자 혀끝에 멤돌다 허공에 퍼져나갈때마다 날카로운 바늘이 심장을 쿡쿡 찌르는것마냥 아파왔다. 묻어두었던 기억은 들추어내지않으면 마치 없었던일인것처럼 최면을 걸듯 스스로를 속일수있지만 그것을 입에 담는순간 진실이되어 다시금 스스로에게 돌아오는거라는걸 이제서야 알았다. 지금 이 순간 요섭에게 자신이 들려주고있는 이야기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것처럼.
"나는 그 아이의 좋은 형이고 그 아이는 나의 사랑스런 동생으로 꽤 오랜시간동안 행복하게 지내온것같았어. 그리고 그날은 그토록 사랑스러웠던 그 아이가 한달전부터 손꼽아 기다려왔던 생일이였고. 아늑한 공간에서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끄는 기대만큼이나 화목하고 즐거운 생일파티가 진행이 되려던 순간 .........누군가가..아버지를.......쐈고.. 바닥은 피로........"
바닥은 단 하나뿐인 나의 아버지의 피로 서서히 물들어갔다. 라는 말이 목끝에서 꽉 막혀버린듯 입밖으로 내뱉어지지못하고있었다. 두준은 머릿속을 덮쳐오는 끔찍한 기억에 양 손으로 제 머리를 세게 부여잡았다. 눈 앞이 자욱하게 흐려지고 날카로운 기억의 파편이 머리에 박힌것마냥 머리가 깨질것만같았다. 요섭은 자신도 모르게 두준의 머리위로 향하는 제 손을 멈춰세우며 힘없이 고개를 떨군체 괴로워하는 두준을 바라보았다.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눈빛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만큼 눈물이 고이고있었지만 요섭은 어떤말을 내뱉을수도 손을 뻗어 자신이 사랑하는 두준을 감싸줄수도 없었다. 그 사람에게 사랑을 알려준것도 그 마음에 들어선것도 자신이 처음일것이라 여겼었다. 처음만난 윤두준은 사랑을 받아본적도 해본적도 없는 얼굴을 가진 딱딱하고 차가운 사람이였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사랑' 이라고했다. 윤두준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양요섭 앞에서 윤두준을 웃게해주는단 한 사람을 향한 '사랑' 을 떠올리면서 아파하는 두준을 요섭은 차마 안아줄수가없었다.
하지만 그보단 역시 도망치고싶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입에 담고있는 두준은 어쩐지 낯설어서 요섭은 들을수가없다고 듣고싶지않다고 소리라도 지르며 이 공간을 1초라도 더 빨리 벗어나고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건 그 아이를 떠올리는 두준은 낯설만큼 기뻐보였고 동시에 슬퍼보였기때문이였다.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앞에두고 다른 사람을 떠올리며 짓기엔 너무도 잔인하지않나싶을정도로 행복해보여서 알고싶어졌다. 차가운 저 사람의 마음속에 누가 있었는지 무엇이 나의 단 하나뿐인 사랑에게 저런 표정을 짓게만들수있는건지 그래서 그 '사랑' 이라는걸 이제와 왜 자신에게 이야기하는것인지 들어야했다. 양요섭은 여전히 윤두준을 사랑하고있고 영원히 변하지않을테니까 믿어야했다. 부서질듯 위태롭게 꺼내어지는 이 이야기를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거라고. 그러니 두준을 사랑하는 자신에게 있어서는 잔인하리만치 아픈 이야기지만 끝까지 들어주고싶었다.
"아버지는 CREVASS의 수장이였고 아버지가 나를 버리기전부터 난 아버지에 의해 조직에서 공격수로 키워지고있었어. 하지만 그 아이는 나와는 다르게 아무것도 모른체 맑고 순수하게 자랐어. 아버지가 죽자 엄마라 불리우던 그녀가 그 아이를 부엌에 숨겼고 나만 덩그러니 남았지. 그녀에겐 떨고있는 그 아이만이 자신의 자식이였던거야. 몇년을 가족으로 지냈지만 그녀에게 자식은 언제나 그 아이뿐이였지. 그래서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게 못견디게 샘이났던걸까..? 피흘리며 죽어가는 아버지 옆에서 어떻게해야할지몰라 그녀만을 바라보던 나를 그녀가 외면한체 돌아섰을때 ... 죽였어. 그 아이가 보는 앞에서 그 아이가 가장 사랑하는 그녀를 죽였어,내가.. 그 아이는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역시 죽인줄알지만 사실은 아니야.. 내가 죽인거였어.."
"....................."
"곧 다른 조직의 공격수가 집안으로 들어왔고 어둠에 몸을 숨긴 내 앞에 총을 든 그 아이가 있었어. 그 아이는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듯 아무런 망설임도없이 그 공격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어. 햇살같이 빛나던 맑고 투명했던 그 아이의 옷자락이 피에 물들고 정신을 잃은 그 아이가 다시 눈을 떴을땐 더 이상 내가 사랑했던 그 아이는 이 세상에 없었어..."
"............"
"요섭아, 나는 어둠속에 있는 내 손을 잡고 눈부시게 환한 햇살아래로 이끌어준 그 아이가 너무 좋았는데 내가 그 아이에게서 빛을 빼앗은거야. 총을 들지 못하도록, 그 작은 손에 피를 묻히지않도록, 투명하고 맑은 그 아이의 눈이 흐린 잿빛으로 물들지않도록 지켜주었어야했는데 누군가를 죽이고싶을만큼 증오하도록 만들었어,내가 .. 그녀는 그 작은 아이가 살아왔던 세상의 전부였는데 내가 부순거야. 증오같은거, 원망같은거 누군가를 미워하는법따위 모른체 살아왔던 그 작은 아이한테 내가 스스로를 망가뜨릴만큼 증오하는법을 가르쳐준거야... 왜 그랬을까."
[아마도 요섭아 나는 그 아이를 사랑하는 동시에 미치도록 증오한거야.]
를 끝으로 이야기는 끝이났다. 그 뒤에도 혼잣말을 읊조리듯 두준은 이야기를 이어나갔지만 요섭의 귀에는 멀어져가는 소리마냥 희미하게 흐려져갈뿐이였다. 두준의 목소리가 누군가가 틀어놓은 음악처럼 흐릿하게 귓가에 멤돌때 요섭은 아주 느린 걸음으로 손을 뻗으면 닿을거리에 있는 두준에게로 다가갔다. 무겁게 내딛어지는 걸음마다 두준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정리가 되어지듯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마도 어린 두준이 살고있던 세상의 전부는 그의 아버지였을거다. 그런 아버지가 어렸던 그를 버렸고 그는 짙은 어둠속에서 외톨이가 되었다. 그가 살아왔던 세상은 온통 어둠뿐인 지독한 극야. 그때 그의 손을 붙잡고 햇살아래로 이끌어준건 그의 아버지를 빼앗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행복하게 살고있는 그의 동생이자 그가 사랑했던 공격수 이기광이였다. 그는 아마도 새까만 어둠뿐인 자신과는 다르게 따사로운 빛으로 둘러싸인 맑고 투명했던 어린 기광을 동경했을지도모른다. 그리고 동시에 미워했다. 어째서 너는 그렇게 환한곳에 있는거냐고 어째서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듯 웃을수있는거냐고 자신에게는 허락되지않은 햇살이 그 아이에게는 허락되는것이 미치도록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일찍만났으면 좋았을걸. 조금더 빨리 당신을 만나서 환한 햇살이 당신위에도 언제나 있었다고 말해줄수있었으면 좋았을걸.. 괜찮아, 괜찮아... 내가 어둠을 가려줄게. 당신위에 떠있는 빛을 볼수있도록 지켜줄게,내가 -"
느린 걸음이 탁자에 기댄체 위태롭게 휘청이는 두준의 앞에 다다랗을때 요섭은 두준의 아래에 자신의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들어 힘없이 떨구어진체 바닥을 향해있는 두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두준의 볼을 쓰다듬었다. 자신의 마음을 담아 손가락끝을 멤도는 따스한 온기를 두준이 느낄수있도록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요섭은 옅게 미소지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요섭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했노라 말하는 두준에게 모든 연인이 그러하듯 못난 질투로 화를 내고 돌아섰더라면 시릴만큼 차가운 그의 어둠을 볼수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를 돌이킬수없는 어둠속으로 몰아넣은 스스로를 미치도록 책망하며 심장을 꽁꽁 얼려버린체 어둠속에 갇혀있던 그를 알지못했을지도 모른다. 그제서야 알았다. 자신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요섭의 따스한 손길에 요섭을 향한 미안함과 기광을 향한 죄책감으로 젖어버린 두준의 눈이 요섭의 두 눈과 마주했을때 요섭은 그제서야 알았다. 기광이 어둠속에 있는 한 두준 역시 햇살아래로 나올수없다는 사실을 -
요섭을 만나 사랑을 하면서 감당할수없을만큼 행복해지는 스스로가 두준은 너무도 두려웠었다. 기광을 향한 죄책감으로 좋아하는 마음한번을 편하게 표현해본적이 없었다. 눈 앞에서 부모를 잃은 기광에게 기댈곳이라곤 단 하나뿐인 형인 윤두준뿐이라는걸 잘 알고있으면서 따뜻한 말 한마디 조차 건네보지못했다. 울고있는 그 아이의 등을 토닥여주지도 못했고 부모를 죽인 사람을 향한 넘치는 증오로 그 아이가 점점 더 깊은 어둠속으로 들어설때에도 막아주지못했다. 끝내 그 아이의 전부였던 그녀를 죽인것이 자신이라고 말하지못했다. 이기광을 파멸로 몰아넣은것은 이기광을 증오하는 윤두준이였지만 끝내 자신이 죽인것이라 말하지못한것은 기광에게 미움받고싶지않은 마음이 간절했던 이기광을 사랑하는 윤두준이였으니까. 이제와 기광만큼 눈부시게 빛나는 요섭을 만났다고해서 행복이 기다리고있는 햇살아래로 달려갈수는 없었다. 이기광은 아직 어둠속에 있으니까. 그것이 윤두준이 양요섭과 결혼을 할수없는 이유이자 요섭과 함께 마음껏 행복해질수없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
"...GK가 무엇이냐고 물었어."
같은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아들, 밥은 먹었어?] 였다. 준형은 손가락 끝으로 제 이마를 꾹 누르다 그래도 펴지지않는 미간에 신경질적으로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있었다. GK - 결코 그녀가 있을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CREVASS 본부에서 그녀가 있을수있는 단 하나의 이유가 그것이라면 알아야했다. 그녀가 속해있는 GK라는곳이 어떤곳인지, 그곳이 아버지와 무슨 관련이 있는건지,그리고 아버지는 언제부터 자신이 킬러조직의 공격수로 있었다는걸 알았던건지, 알았다면 왜 아무말도하지않으셨는지 -
"엄마..."
GK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대답하지않은체 계속해서 동문서답을 해오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결국 준형이 애절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였다. 부탁에 가까운 '엄마' 라는 한마디에 벌써 전화기 너머의 준형의 어머니인 그녀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우고있었다. 애절함을 담아 내뱉은 '엄마'라는 한마디는 아마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려는 심산이였을거다. 준형은 문득 그런 자신이 너무도 우스워 고개를 떨군체 힘없이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 어머니보다는 역시 아버지쪽이 빨랐을거였다. 해야할 이야기도, 들어야할 이야기도 사실은 모두 아버지에게 듣는편이 더 정확하고 빨랐을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치의 망설임도없이 연약한 어머니를 택했던건 -
"..진희를 만난 모양이구나. 조금만 더 기다려주쟀더니 결국 아버지가 .. 준형아, 그러니까 아버지는 -"
"엄마..내가 궁금한건 GK 가 뭐하는곳인 … "
"세계적인 자산가들이 네가 활동한다는 조직으로부터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위해 만들어낸 조직이지. 네 아버지 역시 그 자산가중에 한분이시고. 아마도 진희를 만난건 진희가 GK의 한국지사 책임자이기 때문일거야. 준형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
"아버지는.. 언제부터 알고계셨어?"
"...네가 처음 사람을 죽였을때부터. 하지만 준형아, 아버지가 모른척한건 -"
무서웠기때문이였다. 모든것을 알고있으면서도 지금껏 내색한번하지않은체 언제나 자상하게 자신을 바라봐주었던 아버지와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혹시 그녀가 해주었던말들이 거짓은 아닐까 실낱같은 기대와 함께 떨리는 손을 주체할수가없어 한쪽손으로 다른쪽 손을 부여잡은체 제발 이 모든것이 꿈이길 간절한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바로 지금 수화기 너머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들려오는 믿고싶지않은 버겁고 잔인한 진실을 듣고싶지가않아서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를 택했었다. 혹시 어머니라면 이 모든 사실을 모르고 계실지도 모른다, 혹은 알고계시더라도 내게 다시한번 달콤한 거짓을 속삭여주실지도모른다 는 부질없는 기대를 해보면서 언제나 자신에게 따뜻했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던거였다.
"한심하구나. 내게 찾아올줄알았더니 결국 선택한것이 네 엄마인거냐. 어리광은 그만하면 됐으니 잘 듣거라. 갖고싶은건 모두 가졌고 네가 하는일을 막은적없었다. 너는 원한다면 이 세계를 전부 주고싶을만큼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고 세계적인 자산가의 뒤를 이을 그룹의 후계자이니까. 네가 벌이는 살인쯤 우스웠다. 그저 네가 발견해낸 재미있는 놀이쯤으로 여겼지. 하지만 그 놀이가 아비를 향해있는건 좀 곤란하더구나."
실낱같은 희망도 부질없는 기대도 귓가에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산산조각나듯 무너져내렸다. 휴대폰을 쥔 손이 다시금 떨려오기시작하고 준형의 눈가로 의미를 알수없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들려주었던 믿고싶지않았던 이야기는 감당하기버거운 잔인한 진실이였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바뀌지않을 잔혹한 사실이였다. 정리되지않은체 머릿속을 헤집고다니던 생각들이 어지러진 퍼즐이 자리를 찾아가듯 조금씩 맞춰져가고있었다. 아버지는 모든것을 알고있었고 공격수로서의 용준형의 모습은 호기심에 한번쯤 입에 가져다대보는 담배처럼 어린 소년의 치기어린 장난쯤이였으며 그것을 우습게 여길수있을만큼 아버지는 냉철하고도 무서운 사람이였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쯤이였겠지. 뛰어봤자 아버지의 손바닥안인걸 모르고 세상 무서울것없던 철없는 아들에게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
"네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당연하게 누려왔던것들을 이루어내고 지키기위해 아비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알아야할때가 온것같구나. 놀이는 그만하면되었다. 이젠 그룹을 이어받을 내 아들 용준형으로 돌아오거라."
원하는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손에 쥘수있었다. 그 무엇을 위해 그 무엇을 희생해야하는일따위는 필요치않았다. 그 모든것이 아버지의 아들이기때문이라는걸 왜 몰랐을까. 그 모든것을 가능하게 해준것이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운사람이였는지를 왜 몰랐던걸까. 하고싶은일을 하는것도 원하는것을 갖는것도 스스로의 자유 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준형에게있어 자유같은건 처음부터없었다. 세상 무서울것없이 살아올수있도록 만들어진 아버지의 커다란 방패안에서 아버지가 만들어주는 당연한 권리를 누렸을뿐 그리고 그것은 준형이 아버지의 아들이고 그룹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가능했었던거였다. 그 사실을 이제서야 알았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낸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이루어낼수있는것 역시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바보처럼 이제서야 알았다. 귓가에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체 준형은 고개를 숙였다. 떨림을 멈추지못하는 손끝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지듯 바닥에 떨어지고 준형은 떨리는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싼체 소리없이 눈물을 쏟아내었다.
정리되어지지않은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던 생각들과 어지러진 퍼즐은 모두 제자리를 찾았다. 이제 결코 거스를수없는 아버지의 마지막말에대한 준형의 선택만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이 순간에 잘 웃어주지않아서 한번 웃음지을때면 더욱 예뻤던 현승이의 웃는 모습이 떠오르는걸까. 그리고 왜 그 모습하나에 메마른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세어나오는걸까. 젠장. 미친사람마냥 눈 앞에 네 모습이 아른거리고 귓가에 네 목소리가 멤도는데,, 현승아 이런 내가 너를 떠날수 있는걸까‥?
*
"...풋...푸웃...풋... "
"...왜 자꾸 웃으시는 겁니.."
"...미안미안. 그런데 자꾸 입에서 웃ㅇ..ㅡ..푸웃...."
동운의 입가로 주체할수없을정도로 웃음이 세어나오고 왜 웃는건지 이유를 모르는 기광이 의아함과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동운을 올려다보았다. 미용사보다 더 죽여주는 서비스로 모시겠다더니 욕실로 들어선이후 쭈그려앉아있는 기광의 머리위로 물만 뿌려댔지 다음단계로 넘어갈 생각이없는지 연신 웃음만 내뱉는 동운이였다. 안되겠다싶었는지 기광이 물방울이 떨어지는 젖은 머리를 손으로 붙잡고 다시 한번 동운을 올려다보았고 다시 한번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으며 동운은 그제서야 제 손에 샴푸를 짜서 기광의 머리에 가져다대었다. 뽀글뽀글 거품이 올라오고 기광은 얌전히 고개를 숙인체 거품이 눈에 들어갈까 두 눈을 꼬옥 감았다. 동운은 느린 손놀림으로 기광의 머릿결을 어루만지며 꼬옥 감은 기광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오랜만에 만져보는 기광의 머릿결이 너무도 부드러워서 피식 - 또 웃음이 세어나오고 말았다.
"앗따거! 매워매워,,눈 ..."
기광을 보고있으면 꼭 무엇인가에 홀린것마냥 정신이 아득해져서 동운이 그만 샴푸질을 하던 손놀림을 멈추고말았던 모양이였다. 그 사이 거품이 스르르 기광의 눈가로 스며들었고 덕분에 눈이 따가운지 기광의 미간이 귀엽게 찌푸려지며 입밖으로 투정이 세어나오고있었다. 동운은 서둘러 샤워기에 물을 틀고 빠르게 거품을 걷어내기시작했다. 마음같아서는 투정부리는게 조금 더 보고싶어서 거품을 더 뿌려대고싶었지만 오늘은 이걸로도 충분하지싶었다. 손동운의 아기광은 오늘 체할만큼 동운에게 행복한 웃음을 선물해 주었으니까. 기광은 동운에게 왜 자꾸 웃느냐고 물어왔지만 그 원인은 넘치도록 귀엽고 자체발광 블링블링 빛을 내는 아기광때문이였다. 머리감겨주겠다는 동운의 말에 쏘쿨하게 그러겠다고했지만 머리를 감겨주는 내내 두 볼이 발그레해져서는 정말이지 너무 귀여워서 -
"다됐다! 아구 이쁘다 ~ 일루와 머리 말려줄게."
"...내..내가 할게.."
"그러고가면 감기걸려, 일루와 ~ "
다됐다는 말에 벌떡 일어서는 기광의 젖은 머리에서 셀수없을만큼 물방울이 떨어지고있었다. 젖어있는 기광의 머리를 한쪽 손끝으로 가볍게 어루만져주며 동운이 다른 한 손으로 수건을 꺼내며 기광에게 말하자 두 볼을 밝히며 쑥쓰러운지 기광은 말까지 더듬으며 거절을 했지만 이리오라는 동운의 말에 마지못해 가는 사람마냥 쫄레쫄레 머리를 내밀었다. 이런 모습때문이였다. 기광이 좋아했던 달콤한 향이 감도는 딸기무스케익을 내밀었을때에도 안먹는다며 징징거리더니 몇번 내밀었더니 낼름 받아먹었고 투니버스 tv 따위 보지않을것처럼 굴더니 틀어주면 빨려들어갈것처럼 뚫어져라 몇시간동안이나 tv를 바라보았다. 아주아주 신이나는 얼굴을 하고서는 그렇지않은척, 두 볼을 발그레 붉히면서 괜히 싫은척, 5살짜리 아기광이 아닌 공격수 이기광은 5살짜리 아기광보다 훨씬 더 귀여워서 자꾸만 동운의 입가를 비집고 웃음이 세어나왔다.
"기광아 나 사랑에 빠질거같아."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 머리를 강아지마냥 절레절레 젖고있는 기광을 바라보다 동운이 자신도 모르게 뽀얀 기광의 볼에 입을 맞추었고 갑작스러운 동운의 행동에 또 볼이 딸기마냥 붉게 물이들어서는 놀라서 커다래진 두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기광에게 동운이 속삭이듯 내뱉은 말이였다. 아마도 지금이 처음 기광과 만난 날이라고해도 , 처음부터 5살짜리 아기광이아니라 공격수 이기광으로 만났어도 사랑할수있을것같았다. 처음 사랑에 빠져버린 사람처럼 주체할수없을만큼 설레여서 동운은 자신을 바라보는 기광에게 베시시 웃어보였다. 손동운은 지금 공격수 이기광과 딸기무스케익보다 더 달콤한 사랑에 빠졌다.
*
덜컥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열린 문틈으로 들여다본 작은 원룸안에는 적막한 공기만이 흐를뿐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내심 기대를 했던모양인지 준형이 없는것을 확인한 현승의 입가로 작게 한숨이 세어나왔다. 왜 그랬을까. 여자있냐고 묻는 자신의 말에 망설이던 준형의 대답이 왜 그리도 화가났던걸까. 용준형은 장현승밖에 사랑할수없다는걸 누구보다 잘 알고있으면서 왜 그렇게 불안했던걸까. 자신의 옆에서 영원히 떠나지않을것을 알면서 무엇이 그리도 겁이났었던걸까. 현승은 고개를 내저으며 쇼파를 향해 느리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저 거리를 배회하다 돌아왔을뿐인데 금방이라도 주저앉을것처럼 힘없는 몸이 위태롭게 휘청이고있었고 쇼파에 거의 다다랗을 무렵 쓰러지듯 쇼파에 기대려는데 해맑게 웃고있는 준이가 보였다.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씩씩해? 엄마 아빠 싸우다가 나갔는데 울지도 않고."
텅빈 집에서 무섭지도않았는지 예쁘게도 웃음짓는 준이를 바라보며 현승은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로 자신의 아이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용준형과 장현승의 단 하나뿐인 아가였다. 순간의 감정을 참지못하고 혼자 있을 준이조차 신경쓰지못한체 집을 나갔다는것이 괜스레 미안해져 현승은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있는 준이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예쁘게 잘 키우고싶었는데 엄마랑 아빠랑 싸워서 준이 혼자 남았네..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준아 - "
품에 안은 준이와 시선을 마주하면서 내뱉어지는 말에 현승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정말로 예쁘게 키우고싶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않아도, 결혼하자고 말하지않아도, 정상적인 화목한 가정으로 세상에서 인정받지못한다고해도 상관없었다. 달달한 말들이 오고가지않아도 장현승은 용준형을 사랑하고 용준형은 장현승을 사랑하니까 그리고 그 사이에는 이렇게 어여쁜 준이가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했다. 그런데 왜 자꾸만 눈물이 -
준이를 끌어안은 현승의 입가로 어린아이마냥 울음소리가 새어나오고 걷잡을수없을만큼 눈물이 쏟아져나오고있었다. 충분하지가, 괜찮지가 않았던모양이였다.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을했어야했다. 아무런 말없이 같이 살기만하면 엄마 아빠가 되는게 아니였다. 투정부리지않고 질투하지않고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향한 진심을 덮어두는게 아니였다. 말해줄걸, 사랑한다고 말해줄걸 - 형의 그림자때문에 말하지못하는거라면 백번 천번 속삭여준다고 말해주던 용준형에게 사랑하고있다고, 너를 사랑하지않은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고 그래서 지금 네가 너무 ‥ 보고싶다고.
[야 눈깔. 준이 울어. 그러니까 빨리와..]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지도못한체 현승은 휴대폰을 꺼내어들고 준형에게 보낼 문자를 작성했다. 현승이 표현할수있는 가장 절실한 마음을 담은 문자였다. 아마도 내용은 지금 용준형이 보고싶어서 장현승이 울고있으니 제발 빨리 돌아오라는게 아니였을까.
:) 05
[ ‥ 어떤 사람인가요? ]
나와 현승이를 대신해 아이를 낳아준 그녀에게 감사함을 담은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병실을 나서려는 순간
등 뒤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내 발걸음을 멈춰세웠고 나는 느리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반쯤 열려진 창틈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그녀의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에 스며들었고
얼마남지않은 생명의 빛이 바래지듯 건조하고 메마른 입술에 그려진 그녀의 미소도 흐리게 번져나갔다.
[ 그 아이의 엄마 말이예요. 무척이나 사랑하고 계시다는 - ]
내 품에 안기어 새근새근 잠이든 천사같은 준이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그녀는 다시 한번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보내기가 아쉬운지 그녀의 눈빛은 다정함과 슬픔이 묘하게 뒤섞여 꽤나 아련해보였지만
안타깝게도 이 아이는 그녀의 유전자가 조금도 포함되어있지않은 오직 장현승과 용준형만의 아이였다.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어있지만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과정에서 유전자 조합이 가능하다는 의사의 말에
현승과 자신의 유전자만을 조합하여 만들어진 오직 장현승과 용준형만의 아이 '준'
[ 그 사람은 ‥ ]
나는 마지막으로 품에 안기어진 준이를 그녀가 잘 볼수있도록 그녀쪽으로 내민 후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생명의 빛이 바래져가는 그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것을 꿈조차 꿀수없는 호스피스 병동의 아주 오래된 환자였다.
이제 곧 죽어버릴 그녀에게 아이를 낳는다는것은 이룰수없는 꿈과 같았고
나는 나와 현승의 아이를 품어줄 적절한 대리모가 필요했기에 그녀에게 10달동안 현승과 자신의 아이를 품어주지않겠느냐
제안을 했고 그녀는 아주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 피노키오예요. 거짓말을하면 코가 자라는줄도 모르고 자꾸만 마음을 반대로 말하거든요.]
표현에 서툴러서 무심하게 내뱉어진 모든 말들이 사실은 무척이나 애정어린 곱디고운 용준형의 피노키오.
장현승이 용준형을 사랑하고있다고 더는 참지못하고 외치고싶어질때까지 내가 더 많이 속삭여줄게 -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서툴게나마 마음을 말할수있게되면 길게 자라난 코도 제자리를 찾고
너와 나의 과거에 얼룩져서 네 마음을 짓누르는 아픈 흔적들도 조금씩 바래지게될거야.
그러면 넌 마녀가 걸어놓은 못된마법에서 풀려나듯 코가 자라나는 나무인형이 아니라
용준형을 사랑한다 말할수있는 뽀얀 피부와 예쁜 코를 가진 진짜 사람이 되겠지?
그땐 꼭 다시 너에게 말해줄게.
사랑해. 나의 주인님.
*
[어떤걸로 드릴까요?]라는 점원의 질문에 난감하다는듯 준형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세상에 무슨 꽃의 종류가 이렇게나 많으며 이게 그거고 그게 이걸로 보이는데 이 중에 뭘 골라야하는걸까 - 시간은 없는데 선뜻 골라지지가않아 준형은 점원을 향해 구원의 눈빛을 보냈고 준형의 간절한 눈빛에 돌아오는 대답은 [누구에게 선물할건가요?] 였다.
" 색시요. 얘네들다합쳐놓은것보다 예쁘고 고운 색시예요."
색시. 용준형의 주인님이자 부인의 위치에 있는 현승을 가리키는 섹시 + 각시의 합성어였다. 생각할필요도없는 질문에 베시시웃어보이며 준형이 대답했고 그제서야 적당한 꽃이 생각이 났다는듯 점원역시 웃어보이며 준형에게 잘 포장된 꽃을 내밀었다. [ 백합과에 속하는 꽃인데 꽃말이 아주 좋은꽃이예요. 아스포델이라고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있죠. ] 군더더기없는 단 한송이의 꽃을 받아들며 준형이 점원을 바라보자 어색하게 웃음지으며 점원이 건네준 이야기였다. 아스포델 (Asphodel) :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용준형의 단 하나뿐인 주인 장현승에 바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꽃이 있을까.
조금 더 화려하게 포장된 꽃을 선물하고싶었는데 단 한송이라 실망하지않을까싶었던 우려의 마음이 점원의 설명에 눈녹듯 사라지며 준형은 서둘러 현승이 기다리고있을 집으로 향했다. 어쩐지 소풍을 기다리는 아이마냥 설레이는 기분이 들었다. 방금전까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졌던 현실이라는 녀석은 꿈이였던것처럼 현승에게 달려가는 발걸음은 구름위를 걷는듯 너무도 가벼웠다.
"준이는?"
한치의 망설임도없이 열린 문안에는 꼬끝을 간지럽히는 구수한 찌개냄새와 앞치마를 두른체 칼질을 하는 현승이 있었다. [야 눈깔. 준이 울어. 그러니까 빨리와 ] 라는 문자를 받았을때부터 예상은했지만 울고있는 준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이 현승의 거짓말임을 모르는것이아니였지만 장단은 맞춰주어야했기에 준이의 안부를 물었고 현승은 대답대신 도마위에 얹어진 칼질에 더욱 힘을 줄 뿐이였다. 준형은 걸치고있던 외투를 벗어 쇼파위에 얹어둔후 천사마냥 예쁘게도 잠이든 준이를 바라보았다. 요리보고 조리봐도 울었던 흔적은 보이질않는다. 그렇다면 역시 눈물의 주인공은 용준형이 무척이나 보고싶으면서도 끝내 뒤돌아봐주지않는 바보같은 장현승일거였다.
"어디봐봐."
"...뭘."
"울었잖아. 예쁜얼굴 상했음어떡해."
"..미친새끼. 누가 울었다고 ‥"
제 옆으로 다가와 귓가에대고 말을 걸어오는 준형에게 무심하게 대답하던 현승이 울었잖아 라는 준형의 말에 마음을 들켜버린 아이마냥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말투로 준형에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고 눈 앞에는 예쁘게 포장된 꽃이 준형의 얼굴을 반쯤가리운체 있었다. 예상하지못한 광경에 현승이 말을 멈추며 당황스러움과 의아함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꽃을 바라보았고 준형은 씨익 웃음지으며 들고있던 꽃을 현승에게 내밀었다.
"아스포델이래.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나봐. "
쑥쓰러운지 헛기침을 두어번 내뱉은 후 차마 현승의 눈을 바라보지못한체 준형이 내뱉은 말이였다. [누..누가 이런거 사오래? 쓸데없이 꽃같은걸.......] 느린 동작으로 꽃을 받아든 현승이 불만어린 말을 내뱉으며 미간을 찌푸렸지만 받아든 꽃을 바라보는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있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 준형이 들려준 꽃말이 머릿속을 헤집고 그 말 한마디에 자신이 느꼈던 불안감이 모두 사라져버리는 기분이 들었기때문이였다. 코끝에 멤도는 향기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꽃도 심장을 간지럽히는 수줍은 준형의 고백도 너무너무 좋아서, 알수없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마음 졸였던 시간들이 눈녹듯 사르르 녹아내리는것만 같아서 고여버린 눈물이 어느새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있었다.
"평생 손에 물안묻히게 해주겠다는말도, 평생 행복하게해주겠다는말도, 눈물한방울 흘리지않게해주겠다는말도, 마음 아프지않게 해주겠다는말도, 속상하지않게하겠다는말도 못해."
보고있어도 보고싶은 함께있어도 너무나 그리운 장현승과 결혼을 해야겠다고생각했을때 청혼대신 준비했던건 준이였다. 준이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함께살게될테고 그러면 엄마와 아빠가 되어 결혼하자 라는 말이 오고가지않아도 괜찮은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사랑을 속삭이는것도 힘이 든 장현승과 용준형에게 이 정도면 넘칠정도로 과분한 행복이라고, 분명 함께이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이 사람이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의 아이의 엄마이고 내 하나뿐인 주인님이라고 외칠수없는, 아무런 확신도 미래도없는 불안정한 생활. 그렇게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것처럼 반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고있었다.
"행복하지않을지도몰라. 오늘처럼 널 울릴지도몰라. 살아가다보면 속상한일도 마음아픈일도 분명 있을거야. 하지만 곁에 있을게. 니가 울때, 속상할때, 마음 아플때, 네가 날 필요로하든 필요로하지않든 널 떠나지않을게. 평생 네 옆에 있을게. 너한테 별도 달도따다준다는 그런 말은 못해도 장현승이 용준형의 모든것을 가질수있는 단 하나뿐인 주인이라고는 말할수있어. 그러니까 - "
나랑 결혼해줄래?
오래전부터 준비해두었던 반지를 주머니에서 꺼내들고 준형은 아무런말도하지못한체 울고있는 현승의 네번째 손가락에 조심스럽게 끼워주었다. 그리곤 젖어버린 눈으로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는 현승을 꼬옥 끌어안았다. 소리없이 흐르던 눈물이 자신을 안아주는 따뜻한 안정감에 울먹임이 되고 울먹임이 곧 흐느낌으로 바뀌며 현승은 준형의 품안에서 어린아이처럼 꾸욱 눌러두었던 울음을 내뱉고있었다. 넘쳐흐르는 눈물땜에 현승의 눈앞이 자욱하게 흐려지고 준형은 자신의 품에 안기어 아이처럼 울고있는 현승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주었다. '사랑해, 현승아 네가 울때면 평생 이렇게 네 곁을 지킬게 - ' 귓가에 감기우는 달콤한 고백에 현승이 준형의 옷자락을 세게 움켜쥐며 준형의 품에 얼굴을 묻곤 눈물을 삼켰다. 말을해야하는데, 나도 너를 사랑한다고, 평생 너와 함께하고싶다고 말해야하는데 눈물로 차오른 목이 메여서 입밖으로 아무런말도 나오질않았다. 그게 너무 억울해서 현승은 준형의 품안에서 벗어나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봐주는 준형의 입술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멋진 결혼식장도, 깔끔한 예복도, 사람들의 축복도 없는 그들만의 언약식에 놓여진 단 하나의 선물. 구수한 찌개냄새와 푸른빛의 침대 그 속에 잠이든 천사같은 그들의 아이 그리고 짧지만 깊었던 입맞춤. 아버지의 거스를수없는 제안에 따른 선택은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져있었던거였는지도모른다. 용준형은 장현승을 떠날수없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무색해질정도로 당연하고도 단순한 정답에 준형의 입가로 피식 웃음이 세어나왔다.
설령 돌이킬수없는 이 선택이 향하는곳이 절벽끝이라고해도 현승아, 너와 함께라면 두렵지않아.
*
"물망초. 예쁘지?"
두준을 위해 만들어두었던 텃밭에 물을 주기위해 요섭이 한 손에 물뿌리개를 들고선 텃밭으로 향하던 참이였다. 요섭의 시야가득 곧 다가올 봄의 문턱에서 피어난 물망초에 시선을 빼앗긴체 해사하게 웃음짓는 기광이 보였다. 봄에 피어나는 화사한 꽃들보다도 예쁘게 웃는 기광때문에 왠지 두준이 기광을 왜 좋아했는지 알것만같아 괜스레 샘이 났지만 요섭은 쭈구리고 앉아있는 기광의 옆으로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게위해 기광은 고개를 돌려 요섭을 바라보았고 그 주인이 요섭임을 알아채자 마음에 들지않는듯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곧 시선을 빼앗길만큼 아름다웠던 꽃에는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듯 기광은 자리에서 일어나 요섭에게 등을 돌린체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기광이 두걸음쯤을 내딛었을때 기광의 등 뒤로 기광을 향한 미움과 애절함이 섞여있는 요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나 싫지?"
"..........."
"나도 너 싫어. 근데 - "
"............"
"고마워. 그 사람을 햇살아래로 데리고 나와줘서, 어둠속에 갇혀있던 그 사람을 따뜻하게 안아줘서 ‥ 고마워 "
왜 그때 두준의 옆엔 요섭 자신이 아니라 기광이 있었던걸까. 그때 두준을 안아주지못한게, 두준의 손을 붙들고 따뜻한 햇살아래에서 걷지못한체 요섭은 눈물나게 억울했다. 그치만 그래서 더욱 고마웠다. 잠시나마 그 사람에게 희망이 되어준 기광이 너무 고마워서 언젠가 말할수있는 순간이 온다면 말해주고도싶었다. 그 사람 인생에서 기억할수있는 행복의 순간을 선물해줘서 정말이지 너무 고맙다고, 하지만 -
"물망초. 꽃말은 나를 잊지말아요- 래. 이걸 심으면서 결심한게있었어. 윤두준이라는 사람한테 양요섭이라는 사람이 평생 잊혀지지않도록 만들어야겠다. 나는 더 많이 사랑할거야. 더 많이 속삭이고, 더 많이 애쓸거야. 이젠 내가 그 사람의 손을 붙잡고 햇살아래로 나올거야. 내가 그 사람 옆에 있으면 그 사람 머리위로는 항상 햇살이 비출거고 얼어붙은 마음도 녹아내리겠지. 그러니까 - "
"........................."
"사랑해, 사랑하고있다고, 앞으로도 사랑할거라고. 그 사람 마음속에 있었던 너한테 당당히 말하는거야. 그러니까 그 사람 이제 내가 지킬거야 - "
윤두준을 어둠속에 가만히 둘수는 없었다. 어둠속에 있는 두준의 마음이 기광을 향한 죄책감이든 애증이든 상관없었다. 사랑하니까. 양요섭이 윤두준을 사랑하니까. 양요섭에게 수줍게 사랑을 고백했던 윤두준을 믿으니까. 지금보다 더 많이 사랑해줄생각이다. 언젠가 두준의 손을 꼬옥 잡고 햇살아래를 웃으면서 걸을수있는 그날까지. 그러니까 말하고싶었다. 윤두준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이기광에게 이제는 그의 사랑이 내가 될거라고. 그러니 제발 함께 어둠속에서 나와줄수는 없는거냐고 -
"문자. 보내지마이제 - 뭐라고말해도 그 사람옆에서 떨어질생각없으니까."
*
땀으로 젖어버린 기광의 얼굴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며 동운이 기광의 눈치를 살피고있었다. 기분이 좋지않은지 아무런 표정없이 허공을 응시하는 눈빛이 꽤나 지쳐보였기때문이였다. 무슨일이라도 생긴건가싶어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묵묵부답. 자신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있는 기광이 이제야 좀 웃기시작했는데 오늘따라 꾹 다물어진 입술에 괜스레 야속해지는 동운이였다.
"..보고싶어"
"응? 뭐라구?"
"형아가... 보고싶어 "
손바닥에 담아놓은 베이비 로션을 깨끗이 닦인 기광의 볼에 발라주려는데 귓가에 들리는 기광의 목소리에 동운의 손이 멈추었다. 어느새 눈가에 고여버린 눈물과 울먹거리는 목소리, 옅게 떨리우는 숨소리와 가늘게 떨리우는 어깨 - 동운은 안쓰러움과 다정함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기광을 바라보았다. 매번 기광을 울렸던 하나뿐인 이 아이의 형이 괜스레 미워져 몇번이나 따질까도 생각해봤지만 왠지 두 사람을 보고있으면 끼어들수없는 투명한 벽같은게 있는것만같았다. 차마 들추어낼수없는 깊은 애정을 보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이럴때마다 동운 자신이 해줄수있는건 그저 따뜻하게 안아주고 부드럽게 토닥여주는것뿐이였다.
"저녁먹구 깨끗이 씻구 젤 이쁜옷입구서 보러가자 응?"
따뜻한 동운의 말에 기광은 주먹을 꼭 쥔체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꾸욱 다물고 울지않으려고 애쓰는 기광이 왠지 기특해 동운이 기광의 엉덩이를 두어번 토닥여주며 휴지를 꺼내들고선 흥 ~ 하고 말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듯 훌쩍이던 코를 동운에게 가져다대곤 '흥~' 하며 시원하게 코를 푸는 기광 그리고 그 모습이 귀여워 또 웃음짓는 손동운.
"3초셀거야. 3초안에 도망가야돼. 1.2.3 - "
쪽 -
찡그리는 콧등도 울어서 부어버린 두 눈도, 오물거리는 입술도 귀여운데 어떡해- 보고있으면 너무 귀여워서 만지고 싶고 깨물어주고싶고 뽀뽀해주고싶고 키스해주고싶고 안고싶은데. 그러니까 이건 동운에게는 어쩔수없는일이였다. 끓어오르는 본능을 억누르지못해서 저지르기전에 그나마 도망갈수있는 기회를 주었는데 도망가지않은건 기광이고 그러니 저 쪼꼬만 입술에 쪽하고 입을 맞추는수밖에 -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울먹임이 멈추고 부어버린 두 눈을 크게 뜨고선 기광이 동운을 바라보았고 동운은 그저 베시시 웃을뿐이였다. 이건 억울한거야. 난 분명히 경고했잖아? 라고 말하고싶었지만 공격수 이기광이라며 다시 돌아온 기광은 어쩐지 예전모습과 많이 닮아있어서 유딩도한다는 뽀뽀정도임에도 어린 얘한테 나쁜짓하는 기분이 든다랄까. 결국 살짝쿵 양심에 찔려 어색하게 웃음지으며 아무런말도하지못하는 손동운이였다.
"1초 셀거야. 1초안에 도망가야돼. 1 - "
평소같았으면 양쪽볼을 발그레 붉히며 부끄러워했을 기광이였는데 오늘따라 제 입술에 입을 맞춘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게 이상하다싶었다. 어색하게 웃음짓는 동운의 앞에서 입을 꾹 다문체 침묵을 고수하는 기광때문에 목뒤로 땀이 삐질 세어나오려던 순간 자신의 말을 따라한 기광의 짧은 경고가 이어졌다. 그리고 자신보다 키가 큰 동운에게 안기우는 자세로 달려드는 기광과 반사적으로 안겨오는 기광의 허리를 감싸안은 동운의 손과 동운의 허벅지에 감기우는 기광의 다리, 공중에 안겨있는 그 자세 그대로 기광이 팔로 동운의 머리를 감싸안으며 자신의 입술을 동운의 입술에 가져다대었다. 맞닿은 입술이 열리고 서로를 탐하는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는 격렬한 입맞춤 사이로 피식 동운의 입가로 웃음이 세어나왔다.
[나를 왜 사랑해?]
떼어진 입술사이로 나온 질문. 그리고 곧 다시 이어지는 입맞춤. 기광의 입술에 놓여있던 동운의 입술이 안겨있는 기광의 목을 타고 내려가고 부드러운 혀끝이 기광의 깊은 쇄골에 멤돌았다. 글쎄, 왜 일까 - 이유가 없다고하면 너는 내게 화를 낼까? 자신의 질문에대한 대답대신 더욱 깊게 살결을 간지럽히는 동운의 혀놀림에 기광의 입가로 옅게 신음소리가 세어나오고 기광은 동운의 귓볼을 살짝 깨물며 작게 속삭였다.
[ 동운아 .. 나도 너와 함께라면 햇살아래로 나올수있는걸까? ]
:) 06
[혀엉 ~ ]
나를 등지고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형을 부를때면 형은 언제나 내게로 돌아서서 느리게 걸어오는 나를 기다려주며 애교섞인 내 말투에 말없이 웃어주곤 했었다. 달빛이 서려있는 늦은 밤 작은 방안을 뒤덮은 어둠이 무서워 뒤척일때면 내 가슴을 부드럽게 쓸어내려주던 사람. 나에게 있어 윤두준은 만화영화에나 등장할법한 지구를 지키는 용사처럼 어린 나를 지켜주던 멋진 형이였다. 그래서 선물이라고생각했다. 울지않은 착한 어린이에게 산타할아버지가 주신다는 크리스마스 선물. 크리스마스 이브 꽁꽁 얼어버린 손을 꽉 움켜쥐고서 대문앞을 서성거리던 형은 내게 주어진 세상에서 가장 멋진 선물이였다.
[고마워. 그 사람을 햇살아래로 데리고 나와줘서, 어둠속에 갇혀있던 그 사람을 따뜻하게 안아줘서‥ 고마워]
좀처럼 볼수없었던 꽃이 신기해서였다. 신기한 마음에 쪼그려앉아 감상하던 꽃은 시선을 빼앗길만큼 너무 예뻤다. 유쾌하지않은 만남에 서둘러 돌아서던 나의 등뒤로 들려오던 목소리도 꼭 저 꽃과 같았다. 킬러조직에선 좀처럼 볼수없었던 작고 맑은 사람. 천재적인 해킹실력을 지녔다지만 한없이 여려보이는 어쩐지 무자비한 살생을 저지르는 CREVASS 와는 무척이나 어울리지않는 사람. 그래서였을까. 처음 본 요섭은 호기심을 자아낼만큼 어딘지 모르게 신기한 사람이였다. 그리고 -
[사랑해, 사랑하고있다고, 앞으로도 사랑할거라고. 그 사람 마음속에 있었던 너한테 당당히 말하는거야.
그러니까 그 사람 이제 내가 지킬거야 - ]
잔뜩 상처받은 눈빛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것같은데 조금의 망설임도없이 스스로의 감정을 너무도 솔직하게 말하는 요섭은 돌아보고싶어질만큼 너무 예쁜 사람이였다. 상처받을것을 염려하지않고 사랑을 속삭인적이 있었던가. 오직 나만을 사랑해주는 동운에게조차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본적이 없었다. 내가 준 상처때문에 동운이 나를 떠날까봐서, 동운이 나의 모든것을 다 사랑해줄수없을것만같아서 버림받기싫고 상처받기싫은 불안한 마음에 단 한순간도 마음을 온전히 고백해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였을까. 어쩐지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요섭이 너무도 부러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 등뒤로 들려오는 요섭의 목소리에 묘한 질투와 부러움이 뒤섞여 마음을 헤집었던 그 순간 이유를 알수는 없었지만 괜스레 동운이 보고싶어졌다.
[문자, 보내지마이제 - 뭐라고말해도 그 사람 옆에서 떨어질 생각없으니까. ]
하지만 어쩌지? - 요섭은 아마도 형의 마음속에 있었던 나 역시 형을 마음속에 품고있기에 자신에게 [떨어져] 라는 문자를 보낸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였다. 형을 사랑하느냐고 물어온다면 대답은 '그럴지도' 일것이다. 하지만 그 사랑이라는것이 형을 향한 요섭의 사랑과는 조금쯤 다른 종류의 것이였다. 그러니 형을 사랑했기때문에 형의 곁에 있는 요섭을 향한 질투에 눈이멀어 문자를 보낸것은 아니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형을 사랑하지않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역시 '아니다' 이다. 그래서였다. 사랑보다는 동경어린 설레임에 가까운 이 마음 때문에 형을 바닥이 내려다보이지않을정도로 깊고 위태로운 절벽끝에 세워두는 요섭이 싫었다.
잔인한 살생이 당연스레 이루어지는 CREVASS 에 어울리지않는 작고 여린 사람. 국정원 소속 언더커버요원 양요섭은 이기광의 하나뿐인 형인 윤두준을 위험하게 만들테니까. 어쩌면 결국 위태로운 절벽아래로 떨어지게 만들지도 모르니까 떨어지지않도록 형을 지키기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하고있는 일은 처음 형을 만났을때 꽁꽁 얼어있던 형의 손을 붙들고 어둠속에서 나왔던것처럼 위태로운 절벽끝에서 형의 손을 붙들고 다시 햇살아래로 나오기위해 이기광이 할수있는 유일한 일이기도했다.
*
[일단은 저희쪽으로 넘겨주시지요.]
"...그럼 어떻게 되는겁니까."
길게 늘어선 지하 복도에 기대어선 기광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우고있었다. 초점을 잃은 나른한 시선은 허공어딘가를 멤돌고있었고 입밖으로 흘러나오는 소리는 휴대폰 너머 상대와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던 순간과는 다르게 확신이 서지않는듯 옅게 떨리우고있었다. 기광이 조직을 떠나 반년의 시간을 보내던 중 뜻밖의 상대가 접촉해왔고 그 상대는 비릿한 웃음이 꽤나 역겨웠던 국정원의 국장이였다. 그리고 지금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CREVASS 소탕작전의 총 책임을 맡고있다는 국정원 소속 이준 팀장이였다.
누구에게도 알리지않은체 숨어지내던 자신을 어떻게 찾아냈는지는 알수없으나 자신에게 접근해온 국장의 요구는 간단했다. 언더커버요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못한체 국정원을 배신한 양요섭을 넘겨달라는것 그로써 기광이 얻을수있는건 국정원이 오래도록 노리고있었던 윤두준의 잠정적인 안전이였다. 물론 국장이 원하는것은 조직의 파멸이자 총책임관인 윤두준의 파멸이였다. 그리고 윤두준이 사랑하고 국정원을 배신한 양요섭의 파멸. 이미 요섭의 가족부터 요섭과 가까이 지냈던 주변인물들까지 격리 및 감금 시켰다는 이야기를 건네들었다. 가족을 포함한 요섭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내세운 국정원의 협박 아닌 협박이 요섭에게 이어질것이고 그 협박에 살생과는 어울리지않는 여린 요섭은 결국 CREVASS 를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그것은 곧 기광으로하여금 어딘가가 고장난 사람처럼 감정이 존재하지않았던 윤두준의 유일한 약점이자 두려움인 양요섭이 결국 윤두준을 파멸로 이르게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했다. 바로 그 불안감때문에 기광은 국장이 건네온 딜을 받아들였었더랬다.
[말씀드린데로, 기회와 시간을 드리도록하죠.]
국정원 소속 팀장인 그가 말하는 기회와 시간이란 윤두준의 잠정적인 안전을 지속시킬수있도록 일정기간동안 윤두준을 향해 거누어진 총구를 거두어주겠다는것이였다. 사실은 총구를 겨눈다해도 윤두준의 심장을 쉽게 관통시킬수는 없을것이다. 국정원은 오래도록 CREVASS 를 소탕하기위해 시도해왔지만 매번 실패로 돌아갔고 CREVASS 의 보안은 그리 간단하지않으며 전투력역시 얕볼수있을만큼 약하지않으니까. 그런데 왜 그 제안을 받아들였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단 하나였다. '감정' 상황에 따른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이성을 마비시키는 불안정한 호르몬. 사랑을 하고있는 윤두준은 상대를 위협할정도의 포스를 지녔던 냉철한 총감독관이 아니였다. 그리고 그의 사랑인 양요섭은 호르몬이 넘쳐흐르는 매우 감성적인 사람이였고. 그러니 감정에 휘둘리는 요섭이 윤두준을 위해 그리고 조직을 위해 자신의 가족을 버릴수있을리가 없었다. 국정원의 감시하에 격리되어 자유를 억압당하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모른척 할수있을리가 없었다. 결국엔 그들을 지키기위해 국정원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될거고 머지않아 CREVASS 를 소탕하겠다는 국정원의 작전은 성공에 이르렀을지도모른다.
"다시 연락드리죠."
기광의 입밖으로 작게 한숨이 세어나오고 휴대폰을 든 손이 힘없이 허공에 떨어졌다. 요섭을 넘기는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아니였다. 타겟을 처리하듯 은밀하고도 빠르게 공격수로서의 능력을 발휘해 기절을 시키는정도로 쓰러뜨릴수도있는일이였다. 그런데도 문자를 보냈던건 이성을 마비시키는 거추장스럽고 불안정한 그 감정이라는 녀석이 '사랑' 이였기때문이였다. 요섭이 스스로가 배신한 국정원으로 돌아가 어떤 상황을 겪던 기광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였다. 다만 걱정스러웠던건 자신의 형이자 요섭을 사랑하고있는 두준이였다. 눈 앞에서 갑자기 사라진 요섭때문에 두준이 힘들어할까봐, 괴로워할까봐 기광은 시간을 주고싶었다. 가능하면 제발 요섭이 스스로 두준을 떠나주기를. [떨어져] 라는 세글자에 담긴 애원에 가까운 협박이 제발 통하기를 그래서 요섭이 형의 곁을 떠나주기를 간절히 바랬었다. 사랑하는 연인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지면 그리움과 공허함에 애타는 마음이 더해져 두준은 상상도 할수없을정도로 아프겠지만 요섭이 이별의 말을 남긴체 두준의 곁을 떠난다면 두준이 느낄 공허함은 이별하는 여느 연인들처럼 딱 그만큼일테니까 그 편이 더 좋을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 괜찮은걸까. 정말 자신의 판단이 옳은걸까. 형을 바닥이 내려다보이지않을정도로 깊고 위태로운 절벽끝에 세워두는 요섭을 형의 곁에서 떼어놓는다면 형이 서있게되는곳은 절벽따윈 존재하지않는 안전한 곳인걸까. 어쩌면 지금보다 더한 절벽끝에서 금방이라도 떨어져내릴 사람처럼 서서히 죽어가는것은 아닐까.
기광은 축늘어진체 벽에 기대어진 몸을 일으켜세워 느리게 발걸음을 옮겼다.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불안하게 휘청이고 이유를 알수없는 저릿한 통증이 심장을 스치우는 느낌에 기광의 미간이 안쓰럽게 구겨졌다.
*
"........풋.....준아, 할아버지해봐 ~ 할아버지 ~ "
"..그만좀웃지?"
"야 눈깔. 너네할아버지 진짜 이렇게 생기신거아냐? 완전웃겨 ㅋㅋㅋ 80년대에 찍었다고해도 믿겠어 큭..크큭.."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거대한 저택들이 약간의 거리륻 두고 밀집해있는 ** 동의 문턱에서 현승이 유쾌하게 웃음지으며 품에 안긴 준이에게 사진을 보여주고있었다. 평소라면 현승이가 웃으면 나도 좋아 라며 헤벌쭉 웃음지었을 준형이였지만 이번만큼은 마음에 들지않는다는듯 입에 달고살았던 [씨발 미친제로새끼가 - ] 라는 말이 목끝까지 올라왔지만 꾸욱 눌러담으며 미간을 잔뜩 구긴체 험악한 얼굴을 하고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준형의 노력에도 웃긴건 웃긴거라며 입가에 세어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못한체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현승의 눈가에 너무 웃어서인지 찔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사진속엔 준형의 청혼으로 인해 평생을 함께할 서로의 반려자가된 준형과 현승 그리고 예쁜 색동한복을 입혀놓은 준이가 해맑게도 웃고있었다. 처음으로 찍은 역사적인 가족사진을 바라보며 현승이 웃는 이유는 80년대 흑백사진처럼 2:8 가르마를 한채 제 몸보다 큰 회색빛 양복을 입고 어색하게 웃음짓는 용준형 때문이였다. 어쩐지 그 모습이 팔자주름이 깊게 파인 고집센 할아버지를 보는 느낌이랄까 - 생각하니 또 우스워 현승의 입가로 행복이 스며든 얇은 웃음소리가 세어나왔다.
"..아진짜..씹..쫌 다정하게 굴어줄랬더니 서방님을 이런식으로 놀려먹는다 이거지?"
"어쭈 많이컸다 눈깔? 서방니임?! 델고살아주는걸 고마워할것이지. 그지 준아 ~? 큭큭.."
결국 준형의 입밖으로 짧은 욕설을 담은 애정어린 말이 튀어나왔지만 전혀 무섭지않은지 현승은 입가를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멈추지않은체 오히려 장현승의 딸랑딸랑 꼬봉눈깔주제에 스스로를 서방님이라 칭하는 준형의 말을 약간의 째림과 함께 맞받아칠뿐이였다.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으나 자신을 향해 날라오는 현승의 째림에 준형은 호랑이를 만난 다람쥐마냥 깨갱 할뿐이였다. 물론 절대 장현승보다 말빨이 약해서가 아니라 승리에 가득차 브이를 그려주시는 사랑하는 마눌님을 향한 무한충성의 의미로 져주는것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목적지에 도착하게되면 꽤나 아플지도 모르니 웃을수있을때 마음껏 웃어두는것도 나쁘지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놀려대는 현승이 쬐끔 야속하기는 했지만 피식 함께 웃음짓는 준형이였다.
"괜찮을거야."
"뭐가?"
"아니, 너 긴장할까봐서 - "
"큭..긴장을 왜하냐 "
"간이 배밖으로 나온게 아주 용준형의 주인님 다운데?"
".....칭찬이냐, 그거? -_- "
준형과 현승 그리고 현승의 품에 안긴 준이가 도착한 높은 대문앞은 준형이 살아왔던 그리고 준형의 부모가 살고있는 저택이였다. 그룹의 후계자 용준형이 아니라 킬로조직의 공격수이자 평생 함께할 장현승의 하나뿐인 사랑이자 귀여운 준이의 아빠인 용준형을 보여주기위해 선택한 일이였으며 후계자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거스를수없는 제안에 대한 준형의 대답이기도했다. 인정받는다는것은 차마 꿈조차 꿀수없고 무서우리만치 잔인한 자신의 아버지는 자신과 현승의 심장에 비수로 꽃힐 독설을 서슴치않게 내뱉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할수도 , 피해서도 안되는일이였다. 살생을 놀이쯤으로 여기는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지킨다는 이유로 현승을 위험에 빠뜨리릴지도모르니까. 준형은 간이 배밖으로 나왔다는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하는 현승의 어깨위에 손을 올려 부드럽게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현승의 눈과 어느샌가 잠이 든 준이를 번갈아 보며 부드럽게 웃음지었다. 고마워서였다. 정말이지 오늘만큼 세상에 무서울것없이 당당하고 시크한 장현승이 고마웠던적은 없었으니까.
"실제로보니 더 이쁘구나. 적당히 가지고 놀기엔 어여쁜 장난감이야."
높고 커다란 대문이 열리고 넓은 정원을 지나 다다른곳은 용회장의 서재였다. 서재의 가장 중앙에 놓여진 쇼파에 차마 앉지도 못한체 준이를 끌어안고 서있는 현승에게 서늘한 표정의 용회장이 처음으로 건넨말이였다. 자신의 아들에 관련되어서라면 모르는것이 없었으니 당연히 아들의 곁에 있는 현승의 존재를 모를리가 없었다. 다만 적당히 즐기다 끝날것이라 여겼기에 실제로 마주할일따위는 없을거라고 여겼지만. [조금더 지켜보시면 멋있다고 느끼실겁니다. 예쁘기는 아드님이 더 예쁘거든요.] 현승이 쇼파로 발걸음을 옮기며 자신을 향해 예쁘다고 말하는 용회장에게 건넨 대답이였다. 감히 자신의 앞에서 겁도없이 당돌하게 건네는 대답이 재미있다는듯 용회장의 입술 끝자락에 건조한 웃음이 감돌았다.
마치 신기한 벌레를 보듯이 경멸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용회장의 눈빛을 조금도 피하지않은체 허리를 곧게 뻗고서 쇼파에 앉아있는 현승과는 다르게 준형은 조금 긴장한 눈치였다. 지금껏 언제나 다정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봐주며 모든것을 누릴수있게끔 해주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배신하겠다 말하는자리가 준형에게 편할수있을리가없었다. 현승을 선택했고 그 선택에 후회하지않을만큼 현승을 사랑하지만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않았다. 얼어붙은것마냥 온몸이 경직되고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에 준형은 두려움에 떨리우는 눈동자를 숨기지못한체 그대로 드러내고있었다.
"그럼 어디한번 들어볼까? 예쁜 내 아들이 어디까지 미쳐있는지 - "
몇걸음 앞에 놓여진 쇼파로 다가설 첫발을 내딛지도못한체 서있는 자신의 아들을 향해 용회장이 내뱉은 말이였다. 뻔하디 뻔한 신파를 찍겠다고 젖비린내나는 아기와 하룻밤 데리고 놀기에 적당할법한 계집애같이 생긴 당돌한 소년을 데리고온것일테니 한번 지껄여보라는 의미였다. 아들의 입에서 나오는 신파가 눈물 콧물 질질 짜낼만큼 감동적이다면 전략결혼은 피할수없겠지만 장현승이란 이름의 저 당돌한 소년을 평생 데리고 놀 놀잇감정도로는 인정해줄생각도 있었다. 꽤나 자비로운 마음으로 아들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용회장은 아무런 말도못한체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아들을 바라보다 지루한 하품을 내뱉었다.사랑타령을 늘어놓는 신파란 그런 법이지. 독창성없는 그 진부한 설정이 무척이나 따분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품을 자아내는 그런데 그 마저도 늘어놓지못하는 못난 아들이라 -
"아버지의 아들이여서 자랑스러웠습니다. 원하는 모든것을 제게주셨던 다정하신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라서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런 아버지가 되려고합니다. 그룹의 후계자인 아버지의 아들 용준형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용준형도 모두 그만두고 사랑하는 사람의 듬직한 남편과 제 아이의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려고합니다."
"...................."
"아버지에게는 가지고놀 장난감으로 보이는 장현승이 제게는 제가 가진 모든것들을 잃어도 좋을만큼 소중한 사람입니다. 저에게 모든것을 주셨던 아버지를 잃어도 좋을만큼요. 인정해주시지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이게 진짜 아버지의 아들 용준형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저를 버리십시요. 저도 아버지를 버리겠습니다."
함께온 사람은 용준형이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니 제발 이해해달라며 아버지인 자신을 붙들고 눈물어린 호소를 할것이라 생각했었다. 아무말도 하지못한체 침묵을 지키던 아들이 떨리우는 몸을 진정시키느라 두 주먹을 피가베어나올만큼 꽉 쥐면서 내뱉은 말들에 조금쯤 당황한듯 용회장의 눈빛이 옅게 흔들렸다. 준형의 눈빛은 아버지를 향한 두려움과 죄송스러운 마음이 뒤섞여 눈물이 고이고있었지만 준형은 주먹을 쥔 손에 더욱 힘을주며 굳게 닫혀있는 입술을 깨물었다. 부모의 가슴에 비수를 꽃는다할지라도 그리하여 결국 아버지에게서 차갑게 버려진다할지라도 말해야했다. 모든것을 잃어도 좋다. 장현승과 준이만 남아준다면 부모님을 향한 죄책감에 심장이 부서진대도 견뎌낼수있으리라. 준형은 자신의 말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앉아있는 현승을 바라보았다. 모든것을 잃어도 좋다말했지만 감출수없는 두려움으로 온몸이 파르르 떨리우는데도 자신을 위해 모든것을 내던지는 준형을 바라보며 현승은 옅게 미소지었다. 잿빛하늘을 닮아있는 현승의 흐린웃음뒤로 용회장의 눈빛이 차갑고도 살벌하게 빛나고있었다.
[자네는 잠깐 나와 얘기좀하지.] 해야할말을 마친 준형이 현승에게 나가자는 눈짓을 보냈고 현승이 준이를 안은팔에 힘을주며 쇼파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용회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였다. 준형은 그럴필요없다며 나가자고 재촉했지만 현승은 고개를 내저으며 품에 안고있던 준이를 준형에게 건네주었다. 준형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현승을 혼자둘수없다는듯 쉽게 서재를 빠져나가지못하고있었지만 오히려 현승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안심하라는듯 준형의 등 언저리에 손을 가져다대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다. 현승의 손길에 준형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서재밖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준형이 나가는것을 확인한 후 현승은 고개를 돌려 눈 앞에있는 용회장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드라마를 즐겨보는편인가?"
"글쎄요."
"드라마에보면 재벌집 아들이 가난한 여자를 만날때 부모들이 항상 하는말들이 있지. 돈을 던져주며 떨어지라고하거나 주변사람들을 괴롭히면서 협박을 하거나 - "
"그래서 제게 돈을 주실건가요? 아니면 협박을 하실건가요?"
"..쿡.. 우습군. 돈을 주지도 협박을 하지도 않을걸세. 그저 자네에게 현실이 얼마나 잔혹한지 보여줄생각이야. 드라마는 지어낸 이야기라 리얼리티가 좀 떨어지거든.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바닥끝까지 부서진다는게 어떤건지 보여줄생각인데 어떤가. 그 전에 자네에게 제 발로 떨어져나가줄 기회를 줘볼까하는데 - "
"거절 ‥ 하겠습니다. 바닥끝까지 부서질만큼 제가 가진게 많지가않아서요. 깊이 떨어질 바닥도 부서질 희망도 제게는 없습니다. 하나뿐인 형은 죽었고 그외에 관계를 맺고있는 사람들도없으니 협박도 통하지않을겁니다. 하지만 단 하나만으로도 충분할만큼 빛나는 희망이 있습니다. 회장님의 아들이 바로 제게 빛이고 희망이죠."
"..........."
"제가 가진거라곤 회장님의 아들 용준형과 준이뿐인데 한번 부서뜨려보시던지요. 아들에게서 절 뗴어놓으시려고 아들을 벼랑끝으로 내몰아 철저히 부서뜨릴 생각이신가보죠? 잘모르시나본데 회장님이 지키고싶어하시는 아들이 저한테 좀 많이 미쳐있거든요. 저를 부서뜨리시려면 아드님도 부서뜨릴 각오를 하셔야할겁니다."
[그럼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현승은 조금의 미련도 남지않은 사람처럼 몸을 돌려 서재를 빠져나가기위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곧은 자세로 발걸음을 내딛는 현승의 등뒤로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았다는듯 용회장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퍼져나가다 곧 사그라 들었다. 그렇게 천천히 멀어져가던 현승이 곧 용회장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조금의 두려움도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현승을 떠올리며 용회장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
윤두준. 그쪽. 당신. 아저씨. 뭐라고불러야할지모르겠어서 시작을 못하겠네.
지금 여보 - 아. 같이 사니까 그냥 여보라고하면 안되나? 헤헷 처음쓰는 편지니까 내 맘대루할래!
지금은 새벽 3시를 넘어서고있어서 여보는 지금 잠들어있어.
새근새근 잠이든 여보는 어린아이같아서 아마 여보는 모르겠지만 항상 이 시간이면
난 이렇게 눈을 뜨고 내 옆에 잠이든 여보 얼굴을 보곤해.
새삼스럽게도 너무 멋있어서 반하고 또 반하고 수십 수백번을 반하는데도 매일매일이 설레이고
멍청한 심장이 이제 그만뛸때도 됐는데 자꾸만 뛰어서 혹시 내 심장소리에 여보가 깰까봐 조마조마해.
그런데, 그런데 말야, 여보 - 어린 아이같이 잠이든 여보의 얼굴은 왜 그리 ‥ 슬퍼보일까.
아무것도필요없다, 아무것도 의지하지않는다, 감정따윈 모른다는 잔인한 얼굴로 차갑게 굴면서
잠들어있는 여보는 커다란 손이 무색해질만큼 그 큰 손으로 내 옷 끝자락을 꼬옥 잡고있어.
내가 떠날까봐 두려워하는것처럼 옷자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선 절대 놓아주지않아.
그래서 이 편지를 쓰고있는 지금도 여보의 크고 듬직했던 손은 간절하게도 내 옷자락을 쥐고있어.
왜 그리 슬픈얼굴을 하고있는지 무엇이 두려운건지 여보가 내게 말해주는 순간이 올까?
그런 순간이 오면 그때 내가 여보에게 위로가 되어줄수있을까?
사실은 이말이 하고싶어서 편지를 썼어.
윤두준이 내 옷자락을 위태롭게 쥐고있지않아도 양요섭은 윤두준을 절대 떠나지않을거라고,
그러니까 떠날까봐 불안해하지않도록 더 많이 사랑해줄게.
슬퍼보이는 여보 얼굴도 두근거릴만큼 멋지니까 ♥
- 마이 달링 여보야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 -
늦은 점심식사후 요섭이 주고간 편지를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두준이 펼치고있었다. 기억속에 꽁꽁 묻어둔체 어렵사리 꺼내든 기광에 관한 이야기를 요섭에게 내뱉었을때 어쩌면 요섭과의 관계는 이대로 끝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을 사랑했었노라 말하는 자신을 과연 이해해줄수있을까, 그래서 어쩌면 평생 온전히 마음의 전부를 요섭에게 줄수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곁에 있어줄수있는걸까. 분명 상처받았을텐데 마치 아무일도없었다는듯 웃음짓고 애교부리는 요섭이 안쓰러워서 두준은 더욱 아무렇지않은척 굴수가 없었다. 두준은 제 손위에 펼쳐진 편지를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언제쯤이였을까. 자신이 요섭에게 마음을 고백하기 전에 쓴 편지였을까. 얼마나 오래전부터 요섭은 자신을 좋아해주고있었던걸까.
두준의 시선이 요섭이 건네준 편지의 끝자락에 머무르다 이내 곧 커텐이 쳐져있는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 곧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몸을 일으켜세워 두준은 힘없이 늘어진 발걸음을 창가로 옮겨 창밖이 잘 보이도록 커텐을 옆으로 밀어내었다. 늦은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이 손을 꼬옥 붙잡고 하얀 나비를 쫒고있는 어린 기광과 자신의 머리위로 내려앉고있었다. 눈이 부실정도로 환한 햇살아래에서 기광과 함께 웃고있는 어린 자신의 모습위로 쟃빛구름이 떠있고 가느다란 빗방울이 떨어져내리고있었다. 그리고 그 가느다란 빗방울이 자신의 머리위로 떨어져내리지못하도록 쟃빛구름이 자신을 비추는 햇살을 막아서지못하도록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막아서는 요섭이 있었다. 그랬었다. 환한 햇살아래로 자신을 이끌어준건 기광이였지만 그 햇살을 지켜준건 요섭이였다. 그 작은 몸으로 내리는 비를 전부 맞아내면서도 언제나 자신에게 웃어준 사람 -
"여보~ 물망초가 예쁘게 폈길래 꽃병에 담아왔어. 헤헷 어때, 이쁘지? 지금 밖에 날씨도 정말 좋은데 우리 같이 산책이나 - "
와락 - 어느새 방으로 돌아온 요섭이 한 손에 들린 물망초를 자랑스럽게 두준에게 내밀며 산책을 나가자 조르려는데 요섭의 말이 끝나기도전에 두준이 요섭을 세게 끌어안았다. 이 아이는 도대체 언제부터 혼자서 비를 맞고 있었던걸까. 감정에 서툴러서 제대로 표현조차 해주지못하는 윤두준을 위해 혼자서 얼마나 많이 아팠던걸까.
"막아줄게. 이제 내가 네 머리위로 쏟아지는 비를 다 막아줄게 - "
외롭지않았다 … 라고 한다면 그건 아마 거짓말일것이다. 뇌의 어딘가가 고장난 사람처럼 감정에 메마른 이 남자를 사랑하며 비어버린 마음에 찬 바람이라도 세어들어올때면 웃음으로 가려지지않을정도로 외로웠었더랬다. 하지만 단 한순도 윤두준을 사랑한것을 후회해본적이 없었다. 쓰디쓴 이 사람에게 반해 심장이 제 멋대로 사랑하겠노라 마음먹었던 그 날부터 더욱 많이 사랑하기에 바빴다. 좋은것만 보여주고싶고, 좋은것만 들려주고싶고, 행복한일들만 만들어주고싶었다. 이 남자의 머리위로 따사로운 햇살이 닿을수만있다면 쏟아지는 비를 막아서는것쯤 양요섭에게는 오히려 윤두준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수있는 일이 있어서 기분좋은 일이였다. 그러니 -
"싫어. 그럼 여보가 비를 다 맞아야 하잖아. 그건 사랑이 아니야. 사랑은 내리는 비를 같이 맞는거래, 그러니까 함께하자. "
"........."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먹구름이 껴서 햇살이 가려지든 같이 있자. 응?"
요섭은 물망초를 든 손으로 자신을 안고있는 두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이렇게 꼭 끌어안고있으면 맞닿은체 전해지는 서로의 온기때문에 비가 내려도, 눈이 내려도 춥지 않을테니까. 행복도, 기쁨도, 슬픔도, 시련도 모두 함께하는것. 그것이 요섭이 두준과 나누고싶었던 사랑의 모습이였다.
:) 07
"아가는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 아가의 삶속에서 그 사랑 받고있지요 아가는 사랑받기위해 ~ "
감미로운 동운의 목소리가 기광이 들어선 방안에 예쁘게 울려퍼지고 예상치못한 광경에 아무런 말도 하지못한체 기광은 그저 누 앞에 있는 동운을 바라볼뿐이였다. 불이꺼진 어두운방에 오로지 초 하나가 밝게 빛을 내고있었고 기광의 얼굴을 본따서 만든 이기광 캐릭터 케익을 들고있는 동운의 얼굴이 빛에 반사되어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을뿐이였다. 어둠에 익숙한 공격수답게 실루엣만으로도 초를 끄라고 눈짓을 보내는 동운의 표정을 읽어내며 기광은 후 하고 초를 불었다. 숨을 참고있었던건지 그제야 후 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동운이 형광등의 스위치를 눌렀고 곧 방안이 환해졌다. 환해진 방안에는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체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한 동운이 케익을 기광에게 내밀고 있었고 기광은 어찌할바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동운을 바라보았다.
그날이후. 자신의 생일날 아빠와 엄마에 붉은 피를 토해내며 끔찍하게 죽어갔던 그날 이후 단 한번도 생일을 챙겨본적이 없었다. 자신의 정확한 생일을 누군가에게 말해본적 없었고 동운도 예외는 아니였다. 그렇기에 매번 크리스마스즈음 동운은 특별생일기념이라며 기광의 생일을 만들어내 축하를 해주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로 자신의 ‥ 생일이였다.
"이제 그만하자. 네가 태어난날에 아파하는거 그만하자, 기광아 - "
[난 네가 태어나줘서 너무 고마워. 네 끔찍한 기억속에 있는 이날 이젠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로 기억하게 해줄게] 케익을 탁자위에 내려놓은후 한번도 축하를 받아본적없는 사람처럼 어찌할바를 모르고 서있는 기광을 동운이 꼬옥 끌어안았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목소리로 기광의 귓가에 속삭였다. 충분히 사랑스러운 나의 아가가 아픈 기억을 훌훌 떨쳐버리고 행복하게 웃을수있도록 더 많이 축하해주고싶었다. 태어나줘서 정말이지 너무나 고맙다고 - 그 속삭임이 정말 너무 달콤해서 였을까. 기광의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고있었다. 코끝엔 아직까지 비릿한 피비린내가 멤도는데 기억속엔 아직까지 죽어가던 아빠와 엄마가 선명히 그려지는데 마음 한 구석에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서 찢겨진 심장의 조각들을 감싸안아주는것만같았다. 찢겨진 조각위로 따뜻한 위로가 내려앉아서 조금씩 조금씩 치유되는 기분. 촉촉하게 젖어든 기광의 눈가로 따스한 온기가 담겨있는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케익잘라올게. 울 아가는 어서 손씻고오세요!"
기광을 안고있던 팔을 풀며 동운이 기광에게 웃으며 내뱉은 말이였다. 그말에 흐릿했던 눈 앞이 선명해지고 기광은 깊은 최면에서 깨어난 사람마냥 몽롱한 기분이 들어 케익을 자르러가는 동운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상처받은 자신의 마음을 너무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사람 그래서 자꾸만 웃게만들어주는사람 기광은 멀어져가는 동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웃음지었다. 이제 그만 손을 씻으러갈까하는 생각에 욕실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기광의 시야가득 침대한켠을 둘러싸고있는 사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침대가 놓여진 천장에 가느다란 낚싯줄로 매달아놓은 폴라로이드 사진들. 기광은 무언가에 홀린듯 동운이 준비한 두번째 선물이 위치한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사진속에는 온통 웃고있는 기광이 있었다. 카메라와 시선을 마주한 사진이 없는걸로 보아 아마도 그간 몰래 찍어두었던 모양이였다. 기광을 처음만났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동운은 조심스럽게 햇살처럼 눈부시게 웃고있는 기광의 모습들을 담아내고있었다. 기광은 마치 스스로가 웃는 모습을 처음보는 사람처럼 자신의 웃는 모습이 찍힌 사진 한장을 손에 쥐고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들고있는 사진위로 두준을 처음만났을때 해맑게 웃고있었던 어린 자신의 모습이 겹쳐져보였다. 오래도록 잊고지냈었던 이기광이 가장 순수하게 빛났던 그 순간이 떠올라서 기광의 눈 앞이 자욱하게 흐려졌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수한 얼굴로 웃을수있었던 어린 이기광이 미치도록 그리웠지만 다시 돌아갈수없을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죽이고 스스로를 뒤덮는 증오에 망가져버린 이기광은 두번 다시 그렇게 웃을수없을거라고 -
이제서야 알았다. 동운을 만나 지금까지 함께해온 모든 시간속에 이기광은 어린 이기광처럼 해맑게 웃음짓고있었다는걸. 손동운과 함께하는 모든 시간은 햇살이 가장 빛난다는 오후 2시처럼 언제나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는걸 이제서야 알았다. 어쩌면 그대로 멈춰있었던걸지도 모른다. 가장 빛났던 그 순간에 그대로 멈춰선체 동운의 앞에서는 어린 이기광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상처따윈 받아본적 없다는, 원망도 증오도 미움도 없는 해맑은 어린 이기광처럼 머무는게 좋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사랑해주는 동운이 눈물나게 고마웠는지도 모른다. 이기광을 부서뜨리는 끝없는 증오를 너와 함께있는 동안은 잊을수있었으니까.
"사실 지금도 좋아해. 뽀로로 - "
"응?"
"사탕도 좋아해."
"귀엽긴. 울 아기광 사탕 먹고싶어?"
"좋아해."
"웅? 또 뭐? 울 아가가 또 뭘 좋아하려나~?"
"너. 네가 좋아. 뽀로로보다 사탕보다 훨씬 더 많이 - "
널 사랑해. 이기광을 어린 이기광 그대로 빛날수있게해주는 손동운, 네가 너무 좋아.
머리위로 환한 햇살이 ‥ 비추고 있었다.
이기광이 손동운과 함께하는 모든 시간은 언제나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
"1번 따분하고 안전하게, 2번 스릴있고 긴장감있게 - 선택하시죠."
파리님들도 방문을 꺼리신다는 크레파스 흥신소. 오늘의 상담원 용준형이 새로운 의뢰인에게 계획안이 첨부된 계약서를 내밀고있었다. 크레파스 흥신소의 11번째 고객 이태민. 19살의 나이로 현재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의 신분을 가지고있는 그의 의뢰는 곧 있을 연합모의고사를 전국 상위1%에 들만큼 잘보게해달라는것이였다. 물론 실제 그의 성적은 상위1% 근처에도 가보지못한 공부머리는 유전자자체에서부터 결함된정도의 수준이랄까.
"1번이 좋겠는데요? 저 꼭 성공해야하거든요..! "
11번째 의뢰인 이태민. 눈썹까지 정교하게 잘린 바가지 머리가 꽤나 잘 어울리는 귀여운 소년이 간절한 눈빛으로 준형에게 말했고 이거 영 따분하지않겠냐며 준형은 나른한 하품을 뱉어냈지만 소년은 꽤나 절실한듯 고개를 내저었다. 성적을 잘 받아야하는 이유가 여자친구때문이라나 어쨌다나. 성적을 잘 받으면 양가 부모님들이 교제를 찬성해주시겠다고 말한 모양이였다. 소년의 간곡한 요청에 알았다며 준형이 계약서 사인란을 가리켰고 소년은 그제서야 조금쯤 안심이 되는지 서툰 손놀림으로 사인을 마쳤다.
지금 시간이 AM. 7:57분. 준형은 시계를 힐끔쳐다보더니 소년에게 [일단은 기다려요.] 라고 말한뒤 동운에게 소형 커넥터를 이용해 메시지를 전달했다. 일단 철저한 보안으로 완벽하게 유출을 막아내고있다는 모의고사 시험지는 꽤나 쓸모있는 양요섭 전략가께서 미리 해킹해두셨고 이제 그것을 전달받아 의뢰인에게 넘긴후 답을 달달 외우기만 하면되는건데 -
- 큰일났어요. 형
"뭔데"
- 시험지는 해킹했는데 답지를 깜빡하셨데요.
"아..씹.. 뭔 개소리야. 오늘이 시험당일인데 이제 곧 시험시작이라고!"
- 시험 언제부터죠?
"언어영역 8시 40분 근데 입실은 최소 20분전까지 - "
- 실패네요. 그전까지 답지를 구해도 외울 시간이 없는데 가능하겠어요?
"..야! 안돼! 무조건 성공해야돼!!! 다른 방법없어?"
- 한가지 있긴한데 ..
천재는 개뿔, 세상에 어떤 해커가 시험지만 유출하고 답안지를 빼먹냐고! 시간은 촉박한데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좆같은 상황에 준형이 목끝까지 차오른 요섭을 향한 욕설들을 차곡차곡 억누르며 제법 간절한 마음으로 귀에 장착된 소형 커넥터를 통해 울리는 동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른 의뢰들이야 다 틀어져도 좋지만 이번 의뢰만큼은 반드시 성공해야만했다.
[비슷해.정말?] 이라는 준형의 물음에 킥킥대는 동운의 웃음소리와 함께 [완전 비슷해요] 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동운이 제시한 딱 한가지 방법이란 준형이 소년을 대신해 소년처럼 분장한후 시험장에 입실, 문제의 답안을 커넥터를 통해 동운이 이야기해주면 마킹을 하는 방법이였다. 빠른 시간내로 분장을 서둘러야했기에 전문가가 아닌 비전문가 장현승 선생께서 수고해주셨지만 세심하게 아이라인을 그리는 실력자답게 꽤나 비슷한 결과물이 나온듯싶었다. 물론 순박해보였던 소년과는 조금도 닮지않았지만.
혹시라도 들키는건 아닌가싶어 과도하게 주위 눈치를 살피며 무사히 시험장으로 입성한 준형이 입을 삐죽내밀며 책상에 얼굴을 묻을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귓가에는 여전히 숨넘어갈듯 웃어재끼는 동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음같아서는 욕설을 한가득 쏟아내며 다신 웃지못할만큼 보복이란 어떤것인가에 대해 들려주고싶었지만 답을 불러주는게 동운이였으므로 의뢰가 끝날때까지만 참아내기로하며 준형이 작게 쉼호흡을했다. 후우 - 용준형 왜케 비굴해졌지?
"야 이태민! 오늘 좀 달라보인다?"
어느덧 마지막 시험을 남겨둔 쉬는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머리를 스쳐지나간 기분나쁜 손길에 준형이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부릎뜨고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고 당연히 자신의 친구 이태민인줄 아는 그의 반 친구는 왜 갑자기 무섭게 눈은 치켜뜨고 그러냐며 준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젠장. 울 현승이도 못만져본 머린데 ........참차, 참자, 이번 의뢰만 성공하면 그 손을 아작을 내줄테니, 휴우휴우 마지막까지 들키지않기위해 무섭게 노려보던 눈빛을 순한 어린양마냥 누그러뜨리며 준형은 연신 쉼호흡을했다. 이제 마지막 시험. 이것만 끝나면 드디어!!
[형. 저 잠깐만..................]
저 멀리 환한 빛이 비추고 이제 곧 이 모든것이 끝나리라 벅찬 기대감에 부풀어 답지않게 눈가가 촉촉히 젖어가려던 즈음 답을 들려주던 동운이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아직 문제가 반 이상이나 남았는데 들리지않는 커넥터에 대고 소리를 지를수도없고 벅찬 기대감이 깊은 절망감으로 뒤바뀌며 준형의 얼굴이 새파랗게 사색이 되어가고있었다. 예상치못하게 따분하고 지루한 1번 방안으로 흘러가야할 의뢰가 긴장감있고 스릴넘친다는 2번의뢰로 바뀌며 준형의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고있었다. 공부와 쪼끔만 친했어도 풀어보겠는데 공부하고는 영 인연이 없었던지라 풀수도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금방이라도 울것처럼 준형의 얼굴이 일그러지고있었다.
꼭 성공하고픈 의뢰였다. 워낙에 보수가 비싼탓에 학생 DC 는 없는거냐며 물어오는 의뢰인에게 준형은 데이트는 언제할거냐고 반문했었다. 준형이 원했던 보수는 바로 데이트 교습이랄까. 의뢰인과 그의 여자친구가 데이트를 하는날 몰래 현승을 데리고 쫒아다니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데이트를 하는것처럼 평범하게 시간을 보내고싶었던거였다. 그날만을 꿈꾸며 용준형 답지않게 크레파스 흥신소따위에 열을 올리고있었건만 그 모든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려하고있었다. 준형은 마지막으로 허벅지에 놓여진커넥터의 연결버튼을 두어번 손가락으로 친 후 동운의 응답을 기다렸고 돌아오는 응답이 없자 무언가 결심한듯 주먹을 불끈쥐고 OMR 카드에 거침없이 마킹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형, 시험끝난거아니죠? 죄송해요, 우리 아가가 어제 요리를 해준대서 ..]
시험이 끝나고 교문을 나서던 순간 그제서야 귓가에 장착된 커넥터로 동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기광이 어제 요리를 해주었는데 짜고 맵고 쓰고 달고 인간이 느낄수있는 모든 맛이 다 조합된 오묘한 맛이였더라며 그러나 정말 맛있었다고 배를 부여잡고 달려간 화장실에서 꽤나 힘들었는지 쉰목소리로 말하는 동운의 소리를 듣다 준형은 커넥터의 스위치를 꺼버렸다. 비굴해지면서까지 꼭 다른 사람들처럼 해보고싶었던 데이트였기에 기대했던만큼 실망이커 마음 한구석이 텅 빈것마냥 서늘해진 준형은 동운의 변명따윈 듣고싶지않았기때문이였다. 휴우 - 그래도 혹시나 싶어 축 늘어진 어깨로 가방에 넣어둔 테블릿 PC 를 꺼내어들고선 준형은 동운이 보내준 답지와 자신이 멋대로 휘갈겨낸 답을 맞추어보았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냐고? 오늘부터 용준형의 새로운 이름은 찍신이다. 공부와는 담쌓고살았던 학창시절 못해도 중간은 했었던 성적이 어떻게 유지가 되었나했더니 찍기 신동이였던거였다. 그렇다해도 역시 이건 의뢰인을 이용해서라도 장현승과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고싶은 용준형의 사랑의 힘이아닐까. 그럼 어디한번 용준형의 비굴함을 얹은 땀고 노력의 결실인 달콤한 보수를 받으러 가볼까나 -
*
이기광은 손동운을 사랑한다.
윤두준은 양요섭을 사랑한다.
윤두준을 햇살아래로 이끌어준건 이기광이지만 그 햇살을 지켜준건 양요섭이고
손동운과 함께하는 모든 시간동안 이기광은 늘 언제나 햇살아래에 놓여있었다.
그렇다면 윤두준에게 이기광은 , 이기광에게 윤두준은 무엇인걸까.
[나를 사랑해?] 라는 기광의 물음에 두준은 [...무척이나.] 라고 대답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함께하는 시간이였다. 기광이 한걸음을 내딛으면 두준이 한걸음을 물러섰고 이리와 하고 내미는 두준의 다정스런 손길에 강아지마냥 꼬리를 흔들며 달려가면 언제그랬냐는듯 두준은 내민 손을 감추곤했었다. 서로에게 서로가 너무나 눈부셨던 시간들을 보냈지만 그날 이후. 아버지가 죽고 두준이 어린 기광의 어머니를 죽였던 그날 이후 두준과 기광은 서로의 뒷모습만을 바라볼뿐 결코 마주설수없었다.
"형,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지나간 옛 기억을 더듬으며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볼뿐 아무런 말없는 공허한 침묵만이 작은 방안을 감쌀때 적막을 깨뜨린건 기광이였다. 자신을 사랑했느냐는 질문에 무척이나 라고 대답하는 두준만큼이나 기광 역시 무척이나 두준을 사랑했었다. 잔인한 진실을 은폐하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 영원히 지켜내고싶을만큼. 딱 그만큼 기광은 두준을 사랑했었다.
"그 사람하고 있으면 꿈속을 걷고있는것같아. 미움도, 증오도, 아픔도 없는 천국에 와 있는 기분이야. 형에게도 ‥ 있지?"
사실은 형. 나는 형이 엄마를 죽인걸 알고있었어. 라는 말은 결국 많은 망설임끝에 삼켜버리고 기광은 두준에게서 요섭의 존재를 끄집어내었다. 두준이 어린 자신에게 전부였던 엄마를 죽인것을 기광은 알고있었다. 하지만 인정할수없었다. 인정하게되면 형을 증오해야하는데, 자신에게서 가장 소중한것을 빼앗아간 형을 미치도록 미워해야하는데 그러기엔 기광은 두준을 너무도 사랑하고있었다. 이제 세상에 남아있는건 어린 자신과 자신을 지켜줄 단 하나뿐인 형, 윤두준뿐이였으니까. 사랑하는 형이 자신을 깊은 어둠속으로 밀어넣었다 라는 잔인한 진실을 은폐하고 아버지를 죽인 공격수가 어머니 역시 죽인거라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두준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증오로 변하지 않도록 지켜내었다. 그렇게라도 지켜내고싶을만큼 딱 그만큼 기광은 두준을 사랑했었다.
하지만 가끔씩은 스스로도 모르게 형에 대한 원망이 피어올라서 억누르고 억눌러도 자신에게서 등을 보이는 형을 파멸로 몰아넣고싶을만큼 미운감정이 들어서 기광은 증오해야할 다른 대상을 찾아 끝도없이 집착했다. 어쩌면 기광은 두준을 미워하고있었는지도 모른다. 원망아닌 원망과 미움아닌 미움이 뒤섞여 차마 용서하지못한체 죄책감에 자신에게 다가서지도 못하는 두준을 놓아주지도 붙잡지도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용서하고싶어졌다. 복수는 복수를 낳듯이 증오는 스스로를 집어삼키고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하니까. 그 속에 갇혀버리면 영원히 기광은 행복해질수없을테고 그러면 두준역시 행복해질수없을테니까.
"‥ 그러니까 형 이제 다시 나의 형이 되어줄수는 없어?"
여전히 미안함과 자책감이 뒤섞인 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준의 두 눈과 마주하며 기광이 말했다. 지금의 이기광에게 어렸던 그때의 이기광처럼 해사하게 웃을수있게만들어주는 손동운이 있듯이 윤두준에게는 그 작은 몸으로 어둠을 막아주는 양요섭이 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돌아가는게 어떨까. 윤두준은 이기광을 지켜주던 선물같은 형으로 이기광은 윤두준의 햇살같은 동생으로 돌아가는게 어떨까. 증오와 파멸을 가리키던 어둠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있는 햇살속으로 나가보는게 어떨까.
기광은 천천히 두준에게로 다가가 두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조심스럽게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차가운 겨울날 꽁꽁 얼어버린 두준의 손을 꼬옥 쥐고서 두준이 결코 들어설수없었던 커다란 대문안으로 들어섰던것처럼 기광은 다시 한번 두준을 끌어당겼다. 이제 더이상 자신에게 미안해하지말라고, 이기광을 증오로 가득찬 어둠속으로 몰아넣은 스스로를 자책하지말라고 기광은 제 쪽으로 기울어진 두준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형, 나는 그 사람하고 행복해지고싶어. 그러니까 이제 형을 용서할게.
윤두준은 양요섭의 손을 잡고 이기광은 손동운의 손을 잡고 그렇게 우리 다시 햇살아래를 걷자.
:) 08
"멀리가지그랬냐. 아니면 영원히 찾을수도없게 꽁꽁 숨어버리던가 - "
다시만난 요섭이 그리 반갑지않은지 국정원 소속 이준 팀장의 미간이 두 손을 묶인체 자신을 올려다보는 요섭을 향한 안쓰러움으로 구겨져갔다. 차라리 멀리 도망이라도 가지, 결국 미국으로 오면 어쩌자는건지 스스로의 신분상 배신자인 요섭을 잡아야하는건 당연했지만 요섭의 선배였던 이준은 요섭이 차라리 잡히지않길바랬다. 그러나 결국 예상대로 요섭은 나타났고 아무런 공격수도 대동하지않은체 혼자 나타난 전략가를 생포한다는건 생각보다 쉬운일이였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국정원과의 거래를 통해 요섭을 넘기기로했던 기광은 결국 국정원측의 요구를 거절했고 국정원측에서 요섭을 협박할것이 두려웠는지 국정원 지하실에 격리시켜둔 요섭의 가족을 빼돌렸다. 여기까지는 국장이 짜놓은 가설에서 크게 벗어나지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국장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노는 공격수따위는 신뢰하지않았다. 그저 살짝 미끼를 던져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여주도록 도왔을뿐. 국장이 내건 미끼가 바로 기광이 느꼈던 불안감이였다. 요섭이 자신의 형을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것이 기광을 흔들고 협박의 도구로 쓰일예정이였던 가족을 빼돌리는 계기가 되었을거였다. 하지만 기광이 빠뜨린것이 있었다. 그것역시 국장의 철저한 가설아래 포함되어있었다는것을.
기광이 빼돌린 요섭의 가족을 숨겨둔 장소는 자신이 조직을 떠나 반년간 거주했던 피츠버그의 작은 저택이였다. 그리고 요섭에게 그 사실을 말했고 요섭은 당연히 자신의 가족을 만나기위해 기광이 머물렀던 저택으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자신을 지옥으로 몰아넣기위해 잠복하고있는 국정원 소속 행동요원들이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않은체 요섭은 그저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애틋함으로 발걸음을 서둘렀을뿐이였다. 국장의 가설은 완벽했다. 가족을 이용해 요섭을 협박할거라는 국장의 말에 기광은 가족을 빼돌렸고 그 장소는 예상대로 그가 살았던 작은 저택이였으며 얼마지나지않아 요섭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지금 요섭은 국정원 내부에 위치한 취조실에 두 손이 묶인체 앉아있었다. 천재적인 해커 양요섭을 길러낸 국정원의 보안체계를 그들은 왜 그리 우습게 봤을까. 이준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식사넣어줄테니까 일단 뭐좀먹어. 그리고 힘빼지말자. 버텨봤자 승산없다는거 너도 알잖아.] 작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요섭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이준이 안쓰러운 목소리로 요섭을 바라보며 말했고 요섭은 아무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어쩌다 자신이 가장 아꼈던 후배와 취조실에 앉아 협박아닌 협박과 회유의 말들을 내뱉게되었는지 도무지 믿겨지지가않아서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 문밖에 대기하고있던 요원에게 식사를 들여보내는 의미로 눈짓을 보냈고 알았다는듯 요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리는 둔탁한 소리와함께 식사가 차려진 쟁반을 든 낯선 남자가 요섭의 앞에 멈춰섰다. 남자는 들고있던 쟁반을 탁자위에 내려놓으며 한참을 아무런 말없이 눈 앞에 요섭을 바라보았다. 서늘한 침묵이 작은 취조실을 감싸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요섭은 느리게 고개를 들어 눈 앞에 서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두 눈이 커다래지며 요섭은 금방이라도 입밖으로 그리운 그 이름을 부를까봐서 묶여진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눈 앞에 있는 남자는 잠깐의 이별이 이리 길어질줄도 모르고 긴 말을 하지못한체 헤어져야만했던 보고있어도 눈물나게 보고싶은 윤두준이였다.
[나가자.] 긴 침묵끝에 두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서 여기서 나가자는 말이였다. 두준은 요섭을 데려가기위해 보안요원의 신분으로 국정원에 잠입했고 취조실에 설치된 카메라로 지금 이 상황이 모두 녹화가 되어지고있으니 그마저도 곧 들킬거였다. 그러니 들키기전에 서둘러서 이곳을 빠져나가야했다. 두준이 다시 한번 자신을 올려다보는 요섭의 젖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가자는 눈빛을 보냈지만 요섭은 끝내 아무런 움직이도 보이지않았다.
불가능한 일이였기때문이였다. 국정원의 내부에 대해서는 두준보다 자신이 더 많이 알고있었다. 두준 혼자 이곳으로 들어오는건 그가 가지고있는 공격수로서의 능력이라면 충분했을지도 모르지만 요섭과 함께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무리 뛰어난 공격수라 할지라도 사방이 적인 곳에서 살아남기란 쉽지않은일이란 말이다. 그것도 제 몸하나 지키지못하는 전략가를 데리고는 절대 가능할수없는일이였다. 요섭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점점 귓가에 가까워지고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두준의 존재를 눈치챈 모양이였다.
"가요! 얼른!!!"
발자국 소리가 문밖에 다다랗을 무렵 요섭은 두준을 향해 소리쳤다. 자신때문에 두준까지 위험에 빠뜨릴수는 없었다. 간절한 요섭의 외침이 허공에 멤돌고 두준은 아무런 말도하지못한체 요섭을 바라보았다. 차마 두고갈수가없었고 이제 더이상 요섭이 없는 삶을 상상할수없을정도로 이미 두준에게 있어 요섭은 너무도 간절한 사람이였다. [ 끝아니예요. 나 믿죠? 기다려요, 기다리고있으면 꼭 돌아갈거니까. 우린 꼭 다시 만날거니까 ..] 애절한 요섭의 목소리가 두준의 심장에 닿았을때 두준은 쓰고있던 모자를 깊게 누른후 빠르게 취조실을 빠져나갔다. 여전히 요섭을 두고가는것을 상상할수없을만큼 요섭을 사랑하지만 혹시라도 요섭이 잘못되는것은 아닌지 미치도록 불안하지만 두준은 발걸음을 옮겼다. 요섭의 간절한 그 소리가 두준의 귓가가 아니라 심장에 닿았기때문이였다. 언제나 그래왔었듯이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는 요섭의 속삭임은 헤어나올수없는 마법과도 같았다. 그렇게 두준이 나간후 몇번의 총성이 울렸고 두준의 발자국소리가 자신의 귓가에서 아스라이 멀어져갈때 요섭의 눈가로 눈물이 번지고있었다.
제발 살아주기를, 살아서 다시 만날수있기를 -
*
"자 , 아 ~ 해 "
"지금 그거 먹으라는건 아니지?"
"왜 아냐, 아 ~ 하라니깐? 얼른~~~!!"
CREVASS 와 대립된 조직 B 의 전략가인 장현승이 오후에 본부에 들어가야한다고 몇번이나 말했지만 준형은 들은척도하지않고 현승의 손을 붙든체 어울리지도않는 동물원으로 끌고왔다. 그리고 지금은 제 입에서 쭉쭉 빨던 스푼에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가득 퍼담고선 떠먹여주겠다고 현승에게 조르고 있었고 현승은 기가찬다는 얼굴로 그런 준형을 바라보고있었다.
"야 눈깔 뭐 잘못먹었냐?"
"장현승이 요리에 약이라도 탔나보지~ 안받아머글꺼야?? 빨리!! 팔아파 ~!!"
"...마지막이다, 진짜."
현승이 별수없다는듯 준형을 향해 입을 벌렸고 기다렸다는듯 빙구웃음지으며 준형이 들고있던 스푼을 현승의 입안으로 쏘옥 집어넣었다. 달달하고 차가운 느낌이 혀끝에 감돌자 현승은 눈을 질끈감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따라 왜 이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하루종일 용준형이 보여주는 행동은 토나오는 달달함을 끼얹은 손발오그라듬 그 자체였다. 지나가다 갑자기 보는 눈도 많은데 손을 덥썩잡고 커다란 나무뒤에 뭘 숨겨둔것마냥 끌고가길래 끌려갔더니 입술에다 제 입을 가져다대서 멀쩡한 장현승을 열이 펄펄 나는 환자로 만들고, 다리아프지않다는데도 굳이 업히라며 남부끄럽게 남자끼리 업어주는 행동에, 신고나온 워커끈이 풀리지도 않았는데 묶어주겠다며 챙피하게 리본모양으로 묶고 이제는 아이스크림을 떠먹여주기까지 -
"들어간다. 얼른 준이 찾아오고! 기광이랑 동운이한테 맡기면 어뜩하냐, 우리 이쁜 준이 울리기라도 하면 .. "
달달함을 끼얹은 용준형표 손발오그라듬의 마지막 단계는 데려다주기였다. 사실은 오늘이 용준형이 크레파스 흥신소의 11번째 고객 이태민의 의뢰를 해결해준 보수를 받는 날이였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태민과 그의 여자친구가 데이트하는걸 졸졸 따라다니며 그가 여자친구한테 해주는 행동들을 모조리 베꼈다고할까나. 그러니 오늘 장현승에게 보여준 용준형의 모습은 이런거 해본적이 없어서 어떻게하는건지 모르는 용준형이 할수있는 최선의 애정행각이였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승은 준형에게 무심하게 인사하며 데이트때문에 기광과 동운에게 맡겨놓은 준이가 걱정이 되었는지 당부의 말을 남긴체 조직 B 의 보스가 기다리고있는 건물 보안키에 자신의 손목을 가져다대었다. 언제쯤이면 손목안에 문신처럼 새겨진 칩을 없앨수있는걸까.
"어서와 JIN - "
보스가 있는 방에 들어선 현승에게 어울리지도않게 꽤나 부드럽게 웃음지어보이는 보스의 모습에 현승은 소름이 돋을것만같았다. 그 웃음이 자신을 배신했음에도 최고의 전략가이니 죽이지않고 자신의 곁에 살려두겠다고 말하던 보스의 살기가 서려있는 서늘한 눈빛과는 너무도 어울리지가않아서 오히려 부드러움뒤에 숨겨진 피에 굶주린 칼날이 떠올라 현승의 두 눈이 두려움에 작게 떨리었다.
"하하, 그만 자리에 앉지. 오늘은 자네가 꽤나 좋아할만한 이야기를 하려고하거든."
표정에 드러나버린 현승의 두려움이 꽤나 재미있다는듯 보스가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현승에게 눈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경직된 몸짓으로 곧 현승이 쇼파에 앉았고 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승의 맞은편에 앉으며 들고있던 자료를 넘겼다. 자료를 건네받은 현승이 여전히 굳어버린 몸짓으로 천천히 자료를 넘겼고 그 내용은 한 남자와 그 남자에 관련된 몇가지 사항들, 그리고 그 남자가 최종적으로 머무르게될 장소에 관련된 정보였다.
"오재현. P그룹의 후계자이지. 이번에 의뢰가 하나 들어와서말야. 자네가 해야할일은 오재현을 노리고있는 적이 두번 다시 오재현에게 접근하지못하도록 깔끔하게 처리하는 전략안을 내놓는거지."
"..........."
"아, 그런데 이게 왜 자네가 좋아할만한 이야기인지 궁금하겠군. 이 일이 끝나면 자네를 놓아주도록하지."
"........그게무슨.."
"조직에서 다루기엔 꽤나 간단한 의뢰지만 생각보다 굉장히 중요한 의뢰라서말야. 반드시 성공해야하거든. 그러니 자네가 이 일을 성공시킨다면 그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해주겠다는말이야. 자네가 가장 받고싶은 보상은 자네의 목을 조여오는 조직으로부터의 자유 - 아닌가?"
"......"
"아, 하나 빼먹은게 있군. 우리의 목적은 오재현을 지켜내는게 아니라 오재현을 죽이기위해 접근한 적을 없애는 일이지. 즉 필요하다면 오재현을 죽여도 좋다는 말일세."
현승은 아무런 대답없이 탁자위에 올려진 자료를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CREVASS 와 대립된 조직에 놓여있는 조직 B, 그리고 자신은 언제라도 준형의 심장에 총을 겨눌수있는 B 의 전략가였다. 보스가 자신에게 건넨 제안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 제안을 자신이 성공시킨다면 언제든 서로가 서로를 죽일수있는 당연한 현실속에서 위태롭게 걸어왔던 길을 더이상 걷지않아도 된다. 불안해하지않고, 두려워하지않고 같은 공간에서 그저 서로를 아끼며 마음껏 자유롭게 사랑할수있게되는거였다. 역시 보스다웠다. 현승이 거절할수없는 아주 달콤한 제안 - 보스를 등지고 돌아서나오는 현승의 머릿속에 보스의 제안을 성공시키기위한 치밀한 전략이 그려지고있었다.
*
"그래서 백설공주는 - "
"동운아 - "
"응?"
"어떻게 생겼을까?"
"뭐가?"
"일곱난장이가 살고있던집말야, 동화책에서 보니깐 디게 귀엽고 아늑해보이던뎅... "
니가 더 귀여워 - 자신의 무릎위에 누워 두 눈을 깜빡이는 기광에게 동운이 동화책을 펼쳐들곤 소리내어 읽어주고있었다. 갑작스럽게 물어오는 기광의 질문에 대꾸를 해주다 문득 오물거리는 기광의 작고 새초롬한 입술이 너무도 귀여워 쪽 하고 제 입을 가져다대는 동운이였다. 일곱난장이가 살고있는 디게 귀엽고 아늑해보이는 집보다 백배 천배는 더 귀여운 손동운의 아기광. 풋 - 이게 정말 꿈인지 현실인지 가늠할수없을정도로 요즘 동운은 무척이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이젠 더이상 연기가 아닌 진짜 이기광과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고있는 지금이 동운은 미치도록 행복했다.
"..소심하긴 - "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댄 동운의 가벼운 입맞춤이 끝내 깊은 입맞춤으로 이어지지못하자 그런 동운이 귀엽다는듯 기광이 내뱉은 말이였다. 동운을 사랑하면서 알게된거지만 사랑에는 소유욕과 그에따른 스킨쉽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거였다. 덕분에 기광역시 동운을 보고있으면 입맞추고싶고, 안고싶고, 칭얼대고싶고, 어리광부리고싶고, 투정부리고싶고, 예쁨받고싶고, 밤새도록 안겨있고싶었다. 기광은 무릎에 자신을 눕힌체 앉은자세로 내려다보고있는 동운의 두 눈을 바라보다 팔을 뻗어 동운의 얼굴을 자신의 가까이에 오게 한 후 동운의 목 주위를 깊게 빨아들였다. 손동운은 이기광꺼 도장 꽝꽝 !! 이라는 의미의 키스마크가 동운의 목위에 새겨지고 그게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기광은 해사하게 웃음지었다.
기광의 애정행각에 익숙해질법도 하건만 여전히 쑥쓰러움많은 손동운은 수줍게 볼을 붉히며 어색하게 웃음지었고 그런 동운을 바라보며 기광이 바닥에 놓여져있던 세계지도를 내밀었다. [ 어디로 떠날까 - ] 세계지도를 펼치며 물어오는 기광의 물음에 동운은 [‥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지 - ] 라고 대답했다. 지난 시간은 너무나 눈부셨지만 또 너무나 아팠다. 서로가 서로를 발견할수있었던 이곳은 더 없이 소중한 공간이였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던 더 없이 아픈공간이기도했다. 그래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기억들을 모두 묻어둔체 아픔도, 미움도, 증오도 없는 둘만의 천국으로 -
준형과 현승을 쏙 빼닮은 준이처럼 자신과 동운을 꼭 닮은 예쁜 아가를 낳고 오손도손 작고 소소한 일들에 웃음지으면서
서로가 서로의 전부인체로 평생 그렇게 살자 ‥ 너와 나, 우리 -
*
평소 답지않게 화려하게 식탁위를 수놓은 9첩반상에 놀란 준형이 [오늘 무슨날이야?] 하고 현승에게 물었고 왠일인지 잔뜩 들떠서는 잘웃지않는 현승이 준형에게 웃어보이는 서비스까지 발휘하고있었다. 옛다 관심 뭐 이런느낌이긴했지만 어쨌든 예쁜 현승의 웃음에 준형이 침이 세어나올정도로 헤벌쭉 웃음지으며 마지막까지 요리에 집중하고있는 현승을 뒤에서 꼬옥 끌어안았다.
"자기, 오늘밤 어때?"
"까분다? 좀 봐줬더니 - "
"젠장..준이 생기구 맨날 밤마다 바늘로 허벅지 찔러대는 내 마음을 미친제로새끼가 알리가없지."
"어쭈? 맨날 야동보더만 - "
"야! 그건 내가 다 너라고 상상하고 ‥"
결국 잘나가다 말실수를 해주시는 용준형때문에 준형의 품안에 안겨있던 현승이 도마위에 올려진 칼을 들고 휙 돌아서며 [ 죽고싶지, 니가? ] 라고 말했고 칼든 사람앞에서는 고분고분해야한다는 생존본능에의해 두손 두발 다든체 꼬랑지를 내린 준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숨죽이며 웃음짓는 현승의 눈이 초승달모양을 그리며 예쁘게 휘어졌다.
특별한 날이였다. 준형의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섰을땐 금방이라도 무슨일이 일어날것처럼 불안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않았다. 그리고 오늘 현승은 자유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가느다란 희망을 보았다. 보스의 말을 완벽하게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자유를 얻게된다면 아슬아슬하게 서로의 심장에 총을 겨누는 비극따위는 생기지않을거라는 생각에 어린아이마냥 기분이 좋았다. 간절한 희망에 끝에서 행복이라는 감정에 젖어들고있는 지금 이 순간이 설령 고요한 폭풍전야라 할지라도 현승은 상관없었다.
행복 ‥ 이라는거지?
너를 위해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고, 칭얼대는 준이를 달래며 보드라운 살결에 입을 맞추고,
식탁에 마주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
준형아, 이런걸 사람들은 행복이라고 부르는가봐.
보스가 제안한 작전의 시일은 내일이였다.
그러니 내일이 지나면 이 소소하지만 넘치는 행복에 젖어 현승 자신도 마음껏 웃을수있으리라.
:) 09 _ STRANGER 시즌2 그 마지막 이야기.
[그만하자이제. 장현승이 형을 죽인 죄책감때문에 용준형한테 올수없는거라면 오지마. 내가 가면 되니까.]
[죽어도 사랑한다고 말못하겠으면 하지마. 대신에 내가 할게. 평생 질리도록 해줄게.]
용준형이 장현승을 사랑하는것을 말하지않아도 알고있었지만 내 눈을 바라보며 네 목소리로 직접 전해듣는 너의 고백은
[‥ 사랑해.]
잔잔한 물결위로 달빛이 스며드는 늦은 새벽에 귓가를 간지럽히는 나른한 자장가같았어.
스스로를 향한 자책과 형의 그림자에 짓눌려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못했던 내게 더없이 달콤한 속삭임이였지.
네 그 달콤한 속삭임을 쫒아 어느샌가 아주 깊이 잠이 들었고 그때부터 내 소원은 단 하나였어.
언젠가 , 내가 자유로워지게되면 , 나의 전부인 너를 지켜낼수있게되면 꼭 말하게 해달라고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라고 고백해주는 심장이 두근거릴만큼 멋있는 용준형에게 고백할수있게해달라고
준형아, 오늘은 꼭 너에게 말할게.
그러니까 난 너를 -
*
- 삑 , 타겟발견. 조준했습니다.
현승의 귓가로 B 조직의 공격수로부터 보고가 들어왔고 그제서야 현승은 전략실에서 일어나 커넥터를 귀에 장착한 후 준이가 기다리고있을 집으로 돌아가기위해 간단하게 짐을 싸기 시작했다. 보스가 현승의 자유를 약속하며 건넸던 제안을 위해 현승이 준비한 전략이 곧 성공으로 끝날것이기 때문이였다. 오늘 P 그룹의 후계자인 오재현을 암살하기위해 현승이 상대해야할 적이 오재현에게 접근을 해올것이고 그 접견장소는 오재현이 식사를 하게될 T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였다. 현승은 스카이라운지가 잘 보이는 맞은편 건물에 뛰어난 스나이퍼인 B 조직의 공격수를 배치시켰고 정체를 알수없는 적이 오재현에게 총을 겨누기위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를 암살할생각이였다.
하지만 그 상대가 꽤나 실력있는 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B 조직의 공격수가 방아쇠를 당기기도전 빠르게 오재현의 목숨을 빼앗을수도있고 끝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않은체 다른 방법으로 암살을 시도할수도있다. 생각지도못한 방해요소와 여러가지 가능성에 따른 불안요소들때문에 어쩌면 보스의 제안은 실패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때문에 현승은 다른 전략을 내놓았다. 어차피 적이 노리는것은 오재현의 목숨. 그리고 보스가 원하는것은 오재현을 공격하는 적의 목숨.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오재현의 심장이 멈추면 그 공간이 폭파되도록 폭탄을 설치하는것. 어차피 적은 오재현의 목숨을 빼앗아야할거고 그러기위해 그에게 총을 겨누겠지. 방아쇠가 당겨지고 총구를 벗어난 총알이 오재현에게 닿는 순간 단 3초 사이에 그 건물은 폭파된다. 결국 오재현의 목숨을 노리는 정체를 알수없는 적 역시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되는것이다.
- 삑, 죄송합니다. 워낙에 몸이 빨라서 총알은 빗나갔지만 ‥
"오재현은?"
- 삑, 죽은것같습니다, 그리고 ‥
건물이 폭파되어 현재 불길에 휩싸여있습니다. 라는 보고를 끝으로 현승은 귀에 장착되어있던 커넥터를 꺼내어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작전은 성공이였다. 성공을 예감했었지만 막상 정말로 성공하고나니 얼떨떨한 기분에 현승이 제 손으로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아야 ‥ 정말로 자유의 몸이 되는걸까? 어떤 조직의 전략가가 아니라 오로지 용준형만의 사랑으로 살아갈수있는걸까? 그토록 바래왔던 가느다란 희망이 현실이 되어지는것이 믿기지가않아 마음껏 기뻐하지도못했던 현승의 입가로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고있었다. 집에 돌아가야겠다. 아주아주 예쁜 케익과 분위기를 낼수있는 와인을 사들고서 오늘은 꼭 너에게 말해야지.
그 시각. CREVASS 의 새로운 타겟 NO.2074 세계자산 상위 3%에 속하는 오재현을 암살하기위해 준형이 공격수로 투입된 작전장소엔 소리없는 총성과 짧은 폭파음이 울려퍼졌다.
*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라는 B 조직 보스의 말에 용회장은 건조한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 경고했을때 떨어져나갔으면 좋았을걸.] 대답대신 용회장은 독백에 가까운 혼잣말을 내뱉으며 현승을 떠올렸다. 현승에게 가느다란 희망이였던 보스의 제안은 사실은 현승을 잔인하게 부서뜨리기위한 용회장의 제안이였다. 바닥이 보이지않을정도로 깊은 어둠이라는건 그런거였다. 가장 사랑하는것을 제 손으로 부서뜨리는것. 자신이 준형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것을 알게된다면 그 당돌했던 소년은 어떤 표정을 지어보일까. 그것을 견디며 과연 살아낼수있을까 -
'아들에게서 절 떼어놓으시려고 아들을 벼랑끝으로 내몰아 철저히 부서뜨릴 생각이신가보죠?'
배짱하나는 마음에 들 정도로 꽤나 당돌했고 신선한 대답이였지만 현승이 틀렸다. 용회장은 사랑하는 아들에게서 현승을 떼어놓기위해 아들을 벼랑끝으로 내몬것이 아니였다. 다시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꿈꿀수조차없도록 현승에게서 아들을 잔인하게 빼앗았을뿐. 용회장은 탁자위에 올려진 작은 스위치를 눌러 비서를 불러들였다. 참혹한 폭파현장속에 묻혀있을 아들을 만나러 가기위해서였다. 이제 다시 자신의 품으로 돌아올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용회장은 꽃병에 담겨있는 국화꽃한송이를 집어든체 걸음을 재촉했다.
*
두준이 다녀간 후 요섭이 묶여있는 취조실에는 국정원 소속 행동요원들이 여러명 배치가 되었다. 보안강도를 높였지만 빠르게 해결하는 편이 좋다고 판단한 국장은 폭력을 사용해도 좋으니 요섭에게서 정보를 얻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덕분에 몇번의 심문속에서 요섭의 뺨위로 칼에 베인듯한 핏자국이 새겨졌고 찢어진 입가엔 피가 번져나가고있었다. 혀끝에 감도는 시큼한 피맛에 금방이라도 토악질이 올라올것같았지만 요섭은 저들이 원하는 정보대신 힘없는 웃음을 내뱉을 뿐이였다.
"선배, 나랑 내기안할래요?"
"양요섭, 요섭아 .. "
"앞으로 5분후쯤 보안시스템이 먹통이 될거예요. 하지만 5분안에 저를 내보내주신다면 시스템은 아무 이상이없겠죠."
여전히 그런 요섭이 안쓰러운지 팀장 이준은 애절함이 담겨있는 회유의 말들을 요섭에게 늘어놓았지만 요섭은 그저 옅게 웃음지으며 자신의 맞은편에 놓여있는 시계를 바라볼뿐이였다. AM. 11:25 분. 5분후면 국정원의 보안시스템이 폭파될예정이였다.
"그리고 또 십분후면 각 층에 위치한 작전실이 폭파될거고 그 다음은 부서별 회의실, 그리고 각 팀장들의 집무실을 거쳐서 국장실까지 한단계 한단계 폭파가 시작될거예요. 사상자가 생기고 결국엔 이곳 선배와 내가 있는 취조실까지 폭파되겠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협할거라고는 생각지못했기에 기광에게서 건네들은 이야기는 꽤나 충격적이였다. 그래서 혹시라도 가족을 만나기위해 피츠버그로 떠났을때 혹은 그때가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국정원에 잡힐수도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국정원의 보안시스템을 해킹해 각 방에 연결되어있는 컴퓨터로 바이러스를 침투시켰다. 언제든 버튼하나만 누르면 자동적으로 폭파될수있도록. 그리고 그것을 조절할수있는 리모콘을 동운에게 건네주었다. 요섭 자신이 이틀이상 조직으로 돌아오지못한다면 정확히 AM. 11:30분부터 폭파를 시작해달라고. 오늘이 요섭이 취조실에 갇힌지 이틀째되는 날이였다.
요섭의 말을 믿을수가없다는듯 아니 믿지않는다는듯 이준은 가만히 요섭을 바라보았다. 정의감에 휩싸인 여리고 순수했던 아이가 진정 자신의 눈앞에서 잔인한말들을 담담하게 내뱉는 요섭이 맞는걸까. 요섭이 들려주는 말들보다 눈 앞에 있는 요섭이 더 믿을수가 없어 이준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그때, 정확히 시간이 11시 30분이 되었던 그때 작은 폭파음과 함께 국정원의 보안시스템에 에러가 발생했다.
"어때요, 선배? 이래도 나랑 내기안할거예요? "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가 않는다는듯 이준은 놀란 눈으로 요섭을 바라보았지만 요섭은 여전히 웃고있었다. 요섭의 말대로라면 보안실 직원들은 이미 죽거나 적지않은 부상을 당했을거였다. 그런데도 웃음지을수있다니,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이고도 아무렇지않다는듯 웃어보이는 요섭이 소름끼치도록 낯설어서 이준의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간단해요, 저를 내보내주기만하면되는거예요. 그러면 선배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안전해요."
차마 아무런말도 하지못한체 서있는 이준에게 웃음기가 싹 가신 서늘한 얼굴로 요섭이 건넨말이였다. 지금 요섭의 모습이 이준에게는 무척이나 낯선모습이였겠지만 요섭은 강해지고있을뿐이였다. 세상모든사람의 목숨과 맞바꾸어도 지켜내야만하는 사람이 생겨났을뿐이였다. 그러니 그 사람을 지키기위해, 그 사람과 함께하기위해 지금 요섭은 죽을만큼 애쓰고있는거였다.
"...끝난게 아니라는거 알지? 어떤식으로든 너와 네가 속해있는 조직 잡으려고 애쓸거야. 지금이아니더라도 언젠간, 아마 영원히 - "
정확히 10분후 다시 한번 폭파음이 들렸을때 이준은 요섭의 손발을 묶고있던 끈을 풀어준후 나가도 좋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출구로 향하는 요섭을 막아서는 다른 요원들에게 자신의 지시를 따르라는 눈빛을 보내며 요섭에게 말했다. 국정원의 팀장으로서 할수있는 최선의 선택이였다. 요섭의 말대로라면 결국 이 공간에 있는 모두가 죽고말테니까. 폭파에대한 원인을 찾고, 멈추게하려면 시간이 필요할거고 그 시간동안 얼마나 더 많은 사상자가 생길지알수없는일이였기에 위험부담을 최소한으로 줄인 최선의 선택이였다.
"그럼 난 살아내기위해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겠네요. 걱정말아요, 선배 - 그 사람과 함께면 나 아무것도 무섭지않아."
등뒤로 들려오는 이준의 말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요섭이 말했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고있을 너무도 그리운 두준에게로 빠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양요섭을 위해 준비되어있는 선물처럼 저 멀리 두준의 실루엣이 보이기시작하고 내딛던 발걸음이 뜀박질로 바뀌며 요섭은 두준에게로 향했다. 한 쪽손에는 두부와 다른 한쪽손에는 분홍빛이 감도는 솜사탕을 들고서 요섭을 기다리고있던 두준의 품에 요섭이 안기어오고 두준은 아무런 말없이 자신보다 작은 요섭의 머리위에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단 이틀이였지만 너무도 그리웠던만큼 그들의 포옹은 끝나지않을것처럼 오래도록 이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두준의 허리를 감싸고있던 팔에 힘을 풀고 요섭은 고개를 올려 두준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거봐, 내가 돌아온다고했잖아.] 투정어린 말이 요섭의 입가를 비집고 나오고 요섭은 두준의 가슴에 머리를 묻은체 옅은 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아주 조금 무서웠었다. 정말로 다시는 볼수없게될까봐 강한척 굴었지만 나를 믿으라고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그럴수없게될까봐 두려웠었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돌아올수있었다. 자신을 기다리고있는 포근한 두준의 가슴으로, 듬직한 두 팔안으로 돌아올수 ‥ 있었다. 그 안도감이 너무 좋아서 요섭은 왈칵 눈물이 쏟아질것만같았다. 다시만난 두준의 품이,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저 미소가 믿겨지지않을만큼 너무나도 좋아서 요섭은 두준의 손에 들린 두부를 빼앗아들고 앙 하고 베어문후 두준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렇게 맞잡은 두 손으로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요섭과 두준은 벚꽃이 흩날리는 거리를 걸어가고있었다.
봄이 찾아든 거리는 눈부시게 빛났지만 그들이 걸어갈 이 길은 허공에 메달려있는 외줄위를 걷는것마냥 끝없는 위험속에서 몹시도 위태로울지도모른다. 하지만 무섭지않았다. 서로를 지키기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일들도 해낼수있었다. 함께하기위해 선택한 길이 정의롭지못한 길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후회하지않았다. 결국 위태로운 외줄위에서 끝이보이지않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다해도 함께라면 그들의 머리위엔 항상 아름다운 햇살이 내려앉을테니까.
*
"으아아앙..으앙~~ 동우나... 으앙아아아앙..."
멀리서 들려오는 익숙한 울음소리에 동운이 하던일을 멈추고 헐레벌떡 울고있는 기광에게로 달려갔다. 목에 손수건하나 두르고 멜빵바지를 입고있는 기광의 곁에 도착한 동운이 토닥토닥 기광의 등을 어루만져주었지만 무엇이 그리도 서러웠는지 꺼억꺼억 연신 울음을 내뱉는 기광이였다.
"무슨일이야, 응?? 내가 다 혼내줄게!! 누가 우리 아가를 울린거야!!!"
"흐흑..야,,앙이...야..앙...양..."
"응?? 양이 뭐??"
"뿌울로 여기를..막...으아아아앙........."
아하. 아무래도 엄마양이 뿔로 기광의 다리를 건드린 모양이였다. 아기양이 태어나서 좋다고 히죽거리며 그 곁을 떠나지않더니 기광이 결국 엄마양한테 혼이난모양이였다. [누가 우리 아가 울리랬어?! 키워주는데 은혜도 모르고 .. 배은망덕한 양!! ] 동운은 이제서야알았다는듯 웃음지으며 한가로이 풀을 뜯고있는 양을 손바닥으로 툭툭 내리치며 혼내는 시늉을 해보였고 그제서야 좀 마음이 풀리는지 기광이 헤벌쭉 웃음지었다. 쿡 귀여운 나의 아기광, 울다가 웃으면 뭐 난댔는데 -
"그런데 동우운!"
"응?"
"양의 아가는 어케 생기는거야?? ㅇㅅㅇ "
"응.............?;;;;;;;;;;;; 그그그그그러니까, 그게................."
남자양이랑 여자양이랑 만나서 거시기... 에잇. 예상치못한 질문에 동운의 두 볼이 발그레해지고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순진무구한 눈동자로 대답을 요구하는 아기광이였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하나 싶어 동운이 머리를 굴리는데 씨익 웃으며 동운의 귓가에 대고 귓속말을 하는 아기광. 그 내용은 [ 오늘밤 가르쳐줄거지? ] 였다. 뛰는 동운위에 나는 기광이있다고 그 누가 그랬던가 - 벌겋게 물들어진 볼을 수습하지도못한 동운이 차마 두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반쯤 넋이 나간체 서있는데 그 앞으로 기광이 양들이 모여노는 초원위를 폴짝폴짝 뛰어 다니고있었다. 결국 또 그 모습이 귀여워 세어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못한체 동운은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기광의 뒷자락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이곳은 스위스. 양들이 뛰어놀기에 적합한 넓은 대지와 일곱난장이가 살았던 집을 본따 만든 작은 목장에 손동운과 그의 귀여운 아가 이기광이 살고있었다.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 라고 끝이나는 그들만의 예쁜 동화가 푸른 하늘과 맞닿은 초록빛 초원에 놓여진 자그마한 목장에서 새롭게 시작되고있었다.
*
"준아, 안돼에 ~! 이따가 아빠 오면 후 하고 같이 불자, 응?"
정성스레 준비한 와인을 탁자위에 올려놓고 곧 돌아올 준형을 위해 현승이 케익에 꽃혀진 초위에 불을 붙이고있었다. 벌써 네번째, 불만 붙이면 후 하고 불어대는 준이때문에 계속해서 다시 붙이고있었지만 괜스레 즐거운 기분이 드는 현승이였다. 귀엽고 앙증맞은 아기와 사랑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초에 불을 붙이는건 굉장히 설레이는 일이였다는걸 지금껏 왜 몰랐을까.
"흠흠, 준형아, 사..사...사.."
초에 불붙이는것을 성공하고서 현승이 힐끔 시계를 바라보았다. PM.6:27 분. 6시 30분까지 돌아오겠다고했으니 3분뒤면 준형이 저 문을 열고 특유의 헐랭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자신과 준이에게로 돌아올거였다. 그러면 너무도 해주고싶었지만 오래도록 해주지못했던 말들을 들려줄생각이였다. 몇번이고 연습해보았지만 쑥쓰러워 입밖으로 잘 나오지않는말. 용준형을 지켜줄수있게되었을때, 더이상 불안해하지않고 용준형과 마주할수있을때, 자신의 목을 조여오던 조직으로부터 자유를 얻게되었을때 장현승이 용준형에게 꼭 해주고싶었던말이였다.
현승은 쇼파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준이를 품에 안고서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해보는 낯간지러운 고백에 심장이 터져버릴것만같았다. 준형을 기다리는 이 시간이 너무도 초조하고 설레여서 자꾸만 곁눈질로 시간을 확인하고있었다. 이제 1분, 48초, 27초, 12초, 4,3,2 … 마지막 1초.
저 문을 열고서 네가 들어서면 네 앞에 케익을 내밀거야.
초에 붙여진 불을 네가 후 하고 끄면 네 눈을 바라보면서 말할게.
장현승역시 오직 용준형만의것이라고 ,
1분1초 살아숨쉬는 모든시간 너를 사랑하지않은적은 단 한순간도없었다고
지금 눈앞에 있는 널 너무너무 사랑하고있다고 -
준형아, 오늘은 꼭 너에게 말할게.
[ ‥ 사랑해. ]
[ STRANGER 시즌2 Fin ]
결코 같은 곳에 설수없는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그들의 두번째 이야기. [ STRANGER 시즌2 ]
W. 하루 (hearthm)
* 안녕하세요, STRANGER 작가 하루입니다^^! 보통 다른작가님들께서는 텍스트 파일 하단에 작가이야기를 하시던데 저는 마지막회에서 연재기간동안 STRANGER 와 함께해주신 독자님들께 남겼던 마지막 이야기들을 여기에도 담겠습니다. 아울러 부족한 작가인 저와 함께 연재기간동안 함께해주신 여신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1.용현의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합니다. 유일하게 새드로 끝이난 용현을 두고 아마도 마음이 좋지않을거라 생각되요. 저 역시도 용현을 담아내면서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져와서 마음이 좋지않았어요. STRANGER 시즌2는 돌아오지않을 준형을 기다리는 현승의 설레임으로 끝이나죠. 오랜시간을 돌고돌아 이제야 준형에게 마음을 말할수있게되었기에 현승이 느꼈을 기쁨은 감히 상상할수없는 그 이상이겠죠. 준형이 돌아올 시간만을 기다리며 뛰는 심장을 주체하지못한체 설레임에 초조해했을 현승이는 아마 그 순간 가장 행복한 사람이였을거예요. 하지만 준형이는 돌아오지않죠. 끝내 전하지못할 현승이의 고백은 다 타버릴 초와 함께 적막한 허공어딘가에서 먼지처럼 사라져버리겠죠. 왜 그런 엔딩을했느냐 제게 물어오시면 '역설을 통한 비극의 극대화' 라고 말씀드릴거예요. 먹먹한 그들을 달달하게 풀어내려했던건 이것이 픽션이기때문이지만 현실이라면 어땠을까요? 용현을 통해 보여드리고싶었던건 픽션에 의한 달달함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고있는 잔인하고 먹먹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것이 끝이냐고 물어오신다면 끝이 아니라고 말씀드릴겁니다. 용현의 다음이야기는 번외를 통해 전해드리겠습니다.
2.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STRANGE 시즌2는 달달한데도 먹먹하다 라는 이야기요. 어쩌면 그 말이 이들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이 아닌가 싶어요. 다른사람의 시선으로 봤을때 그들은 결코 행복해질수없는 사람들입니다. 언제든 누군가의 타겟이 될수있고 언제라도 죽음을 맞이할수도있죠. 잠이드는 그 순간조차 누군가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질수없는 그들은 살아있는 모든것은 위험속에 있다 라는 말을 실감시켜주는 '불안정함' 그 자체예요. 그런 그들이 , 스스로를 지키기위해 누군가를 죽여야만하고, 그 누군가를 믿어서도 안되는 그들이 사랑을 하려고합니다. 보듬고, 감싸고, 질투하고, 사랑을 속삭이다가도 가끔은 싸우는 - 우리가 흔히 알고있지만 누구나 할수없는 그런 '사랑' 말이죠. 그들은 그렇게 그들이 결코 헤어나올수없는 위험속에서 사랑을 하고있어요. 서로를 지키기위해, 함께하기위해 조금씩 더 강해지고 함께하는 모든시간에 더없이 행복해하면서 더욱 깊이 사랑을 속삭이고있죠. 낯선 세상에서 햇살이 되어줄 서로를 발견한 그들은 지금 달달하고도 먹먹한 그들만의 천국에 있지않을까요?^^
3. STRANGER 시즌2는 번외 1편이 남아있습니다. 번외는 시즌2를 읽으시고 다음카페 비스픽(http://cafe.daum.net/B2Sfic)을 통해 제게 쪽지로 감상평을 보내주시거나 감상방에 감상글을 올려주시는 독자님들께만 따로 메일링해드리겠습니다. 비스픽 회원이 아니신 분들은 작가 메일주소(writerhm@naver.com)로 짧은 감상평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감상평을 남길때 꼭 정확한 메일주소를 첨부해주세요.(번외는 용현이 중심이고, 운광 수위물을 따로 생각하고있습니다. 물론 공금파일입니다.)
4. 하단에 STRANGER 시즌1 번외 윤두준*양요섭의 이야기 [양꼬마의 유리구두] 가 이어집니다.(극야 프롤로그아래에 있어요)
5. 하루의 다음작품은 비스트 팬픽카페 '비스픽' - http://cafe.daum.net/B2Sfic 에서 만나보실수있으세요^^!
* 2022년 희귀한 신종 바이러스에 감염된 그들을 둘러싼 실험과 음모, 타락과 파멸, 거짓과 진실 그리고 사랑.
그들이 펼치는 잔혹한 게임속 [극야 極夜] 소개글 (http://cafe.daum.net/B2Sfic/hfpF/1055)
* 극야 미리보기 _ 프롤로그 (읽으셔도 되고 읽지않으셔도 됩니다.)
있잖아 슈 (Shoe) . 극야 … 라고 들어봤어?
해가뜨지않고 영원히 밤이 지속되는 현상이래. 어때? 그때가 떠오르지않아?
짙은 어둠이 빛을 집어삼키고 어둠아래로 핏빛이 물들기도전 고약한 피비린내가 후각을 자극했었던 그때말야.
혹시 떨고있어? 떠올리는것만으로도 끔찍한 기억은 역시 묻어두는편이 좋으려나 -
그런데 shoe - 난 아직 잘 모르겠어. 신은 왜 우릴 버렸을까?
2025.03.08 20:58 - 16s From _ K
조금 ‥ 떨렸어. 믿을지모르겠지만 빛이 무서워졌거든.
극야 ‥ 영원히 끝나지않을 어둠에 갇혀있을때 빛을 향한 갈증에 미치도록 허덕였는데 참 이상하지?
지금은 나를 집어삼킬 어둠을 찾아헤메고있어. 떠올리면 진저리날만큼 끔찍한 기억인데 묘하게 그리워.
아마도 K - 신은 우릴 버린게 아니라 선택 한거야.
2025. 03. 24 14:27 - 22s From _ Shoe
*
[연예가 뉴스입니다. 가요계 정상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있던 아이돌 가수 Y 군이 원인을 알수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현재 격리치료중인것으로 밝혀져 팬들에게 슬픔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Y군이 감염된 바이러스는 현재 그 위험성이 밝혀지지않은 바이러스로 최근 국내에서 발견되기 시작한 희귀바이러스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감염자는 총 12명으로 그들은 모두 ‥]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에 은색의 희미한 줄로 감겨져 자유롭지못한 소년의 맞잡은 두 손이 가늘게 떨리우고있었다. 불과 30분전이였다. 그 일이 발생하기전까지 소년은 가십이라면 지긋지긋했고 지금 들려오는 리포터의 목소리는 콧소리로 앵앵거리는게 맘에 들지않아 채널을 돌리곤했었다. 하지만 그 소리마저 더 듣고싶을만큼 소년은 이 곳에서의 소리가 귓가에서 점점 희미해지는것이 소름끼치도록 두려웠다. 팔찌모양을 한 멘탈소재의 검은 물건이 소년의 귀를 덮으며 눈가부터 뒤통수까지 씌워졌고 그때부터 귓가에 울려퍼지던 소리는 희미해지고 눈 앞은 아찔할정도로 짙은 어둠으로 뒤덮였다. 둔탁한 물건으로 누군가가 등 언저리를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뿐 소리도 빛도 잃어버린 소년은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가장 깊숙한 미로에 빠진것마냥 불안한 몸짓으로 휘청였다.
공포심을 이기지못한 현장팀 요원하나가 반쯤 넋나간 표정으로 소년의 뒤로 몇 걸음 물러서있었고 그 뒤로 상황을 점검하기위해 다가온 팀장이 가볍게 요원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깨에 닿는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요원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포와 불안함이 뒤섞여 눈빛이 크게 흔들리고있었다. [ 제대로씌웠어? ] 라는 팀장의 물음에 [ 일단은 박사님 말씀대로 제어장치를 씌우긴했지만 저희 팀 요원하나가‥] 라는 떨려우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석연치않은 대답에 팀장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지고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요원의 시선이 몇 걸음 앞에 떨어진 소년의 발끝으로 향했다.
'.....N-2팀 이동준비하고 현장팀은 남아서 시신수습해.'
..젠장. 짧은 욕설이 입밖으로 튀어나오고 팀장은 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요원의 시선을 따라간 그곳에는 차마 형태도 알아볼수없을정도로 참혹하게 타버린 현장팀 요원이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온몸을 휘감은 제어장치덕분에 균형감각을 잃은체 불안하게 휘정거리는 저 소년 때문일것이다. 팀장은 두 눈을 질끈감고 온몸을 휘감은 떨림을 억누르느라 주먹을 꽉 쥐고있는 요원의 어깨에 손을 올려 있는 힘껏 세게 감싸쥐었다. 눈 앞에서 몇 년의 세월을 함께해온 동료가 한줌재가되어 사라졌으니 그가 느꼈을 공포는 상상 그 이상의 것일지도모른다. 그러나 싸워야 할 상대는 공포감이 아니였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달달한 목소리와 작고 귀여운 얼굴을 하고선 사람을 한 줌 재로만들어버릴수있는 끔찍한 소년. 원인불명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소년 그 자체였다.
[..시신 잘 수습해줘.] 팀장이 요원의 어깨를 움켜진 손을 가볍게 풀며 말했다. 명령이기에 앞서 위로였고 위로이기에 앞서 결의를 얹은 말이였다. 전쟁과 마약이 끊이지않는 2022년. 미친세상에서 더 이상의 희생자가 없도록 하기위한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자 함께 싸워나가야할 요원을 향한 애정어린 말 이였다. 요원은 세어나오려는 눈물을 주먹으로 닦아내고 동료의 마지막을 지켜주기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로써 127번째 희생자가 속출되었다. 그리고 세상을 혼란으로 빠뜨릴 12번째 감염자가 등장했다.
*
둔탁한 물건이 등 언저리를 누르는것의 의미가 [걸어] 라는것임을 소리를 잃은 소년이 알수있을리가 없었다. 자신은 그저 도망치고싶을뿐이였다. 무대를 마치고 여느때처럼 팬들에게 눈짓과 손짓으로 고마움을 표현하고있었고 매니저의 경호에 공연장을 빠져나가던 중이였다. 아마도 팬으로 추정되는 소녀의 손이 소년의 머리채를 잡았고 머리카락이 뽑혀나가는 아픔에 소년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지며 짧은 비명이 묻어나왔다. 그뿐이였다. 소년은 그저 입밖으로 아프다는 소리를 내뱉었을뿐이였다. 그러나 일그러진 얼굴로 시선을 돌린 소년의 눈앞에 펼쳐진건 소년의 머리채를 잡은 손가락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그리고 잔혹하게 타들어가는 소녀의 모습이였다.
그런 짓을 자신이 했을거라고 생각하지못했다. 소년은 그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소름끼치도록 무서웠고 빠르게 그 자리를 피하고싶었을뿐이였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편안하게 쉴수있는 숙소로 돌아왔고 여느때처럼 티비를 켜고 쇼파에 기대어 방금 자신에게 일어난 끔찍함을 잊기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있었다. 그러기를 30여분쯤 지났을까. 가벼운 폭파음과 함께 문이 부서지고 전투태세를 갖춘 사내들이 소년에게로 다가왔다. 제어장치는 성공적으로 씌워졌지만 소년에게 제어장치를 씌우기위해 손을 가져다댄 요원하나는 소녀처럼 서서히 타들어갔고 그것이 소년이 본 마지막 광경이였다. 그들은 자신의 짓이라 여기는듯했지만 소년은 이 역시 자신이 했을거라고 생각하지못했다. 오히려 억울하다면 억울한쪽에 가까웠다. 자신은 손가락하나 까딱하지않았으며 심지어 죽기를 원했던적도없었는데 자신이 죽일수있을리가없다. 소년은 보이지않는 두 눈을 질끈감았다. 그저 한낱 꿈이길‥ 눈을 뜨고나면 아무것도 아닌 끔찍한 악몽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것밖에 소년은 할수있는것이 없었다.
팀장은 다시한번 들고있는 LIT의 스위치를 눌렀다. (LIT : 일종의 무인조종기. 바이러스 감염자들에게 사용되는것으로 터치하지않고도 일종의 자극을 주는 장치) 몇번인가 눌러 소년의 등 언저리에 압박을 주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선체로 불안정하게 휘청일뿐 걸음을 옮기지않았다. 제어장치를 씌우긴했지만 확실히 제어가 되는지 확신이 서지않기에 섣불리 도구나 손을 이용해 이동을 할수도없는노릇이였다. 팀장은 곤란한 표정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이미 한명의 사상자가 생겨 긴장한탓에 LIT를 쥔 손에 땀이 베어나오고 소년을 원하는 장소까지 이동시킬수있는 최선의 방법이 선뜻 생각나지않았다.
LIT의 강도를 최대한으로 높여 미는 힘으로라도 소년이 걸음을 뗄수있도록 하자는 팀장의 생각은 긍정적인 결과를 가지고왔다. 휘청이던 소년의 몸은 갑작스러운 힘에 밀려 중심을 잃고 넘어졌지만 소년은 곧 바닥을 짚고 스스로 일어서기 시작했다. 아마도 자신의 등 언저리를 누르는 힘이 [걸어] 라는 의미임을 알아차린건 아닌듯싶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위태롭게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경로방해하지말고 옆으로 비켜서. 게이트에 들어서면 그대로 이동한다.] 현장에 들어선 요원들을 향한 팀장의 명령이 끝나자 요원들이 소년이 걸어나오는 방향으로 옆으로 일제히 비켜서며 소년의 가장 가까이에 최종 게이트(GATE) 를 설치했다.
앞으로 한 걸음. 쓰러질듯 불안하게 휘청이는 걸음으로 소년의 발이 게이트에 들어서고 팀장은 LIT의 스위치를 다시 한번 세게 눌렀다. 누군가가 떠미는듯 압박하는 힘에 소년이 게이트안으로 넘어지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강한 푸른빛을 반사하던 게이트의 빛이 서서히 흐려지며 소년의 모습이 사라졌다. 소년을 목적지로 데려다줄 게이트(GATE)는 빛으로 이루어진 고차원적인 기계의 일종이였다. 사람 하나가 들어설정도의 작은 상자모양을 하고선 입력되어진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는 기계. 인간의 육안으로는 설치할 당시에만 볼수있으며 사라진후에는 목적지에 도착할때까지 볼수없다는 이 기계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이동이 가능한지를 아는 요원은 그 누구도 없었다. 그저 국가적 차원에서 운영한다는 실험실로부터 공급되어졌다는것밖엔. 도대체 그 실험실에선 누가 이런것들을 만들어내고있는걸까.
[ 게이트 이동시작했습니다. N-2 팀 이동합니다. ] 손목에 채워진 통신기에 대고 상부에 보고를 마친 팀장은 게이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봐도 믿을수없는 광경들이였다. 원인불명의 미친 바이러스들도, 감염자도, 끔찍하게 죽어나가는 사상자들도, 제어기구와 최악의 경우 사용하게끔 되어있는 독으로 불리우는 DV도, 방금까지 눈앞에 펼쳐졌던 게이트라는 기계도‥. 첨단과학이 제 아무리 발달한다할지라도 이런 순간이 오게될줄은 정말 상상도하지못했었다. 지금의 세상은 불과 10년전까지만해도 상상도 할수없던 세상의 모습이였다. 어느새 손에 들린 담배를 물며 팀장은 옥상에 위치한 헬기로 이동했다. 게이트가 도착하기전 서둘러 그곳으로 가야했기때문이였다. 신이 노하셔서 재앙을 일으킨것마냥 타락한 세계. 이것이 지금 팀장이 살아가고있는 대한민국의 모습이였다.
*
사방을 둘러싼 모든 벽면이 새하얀색으로 칠해져있는 작은 방안에 푸른빛이 그려지고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했던 빛은 눈이 부실정도로 더욱 크고 강해졌지만 처음보는 광경이 아니라는듯 그곳에 있는 누구도 놀라워하지않았다. 곧 빛이 사그라들고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방안에 설치되어있는 여러대의 카메라로 게이트의 도착을 바라보고있던 팀장은 LIT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리셋(Reset) 버튼을 눌렀다. 게이트가 사라지고 무중력상태에 놓여있던 소년이 힘없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타겟을 실은 게이트는 목적지에 도착하면 스스로 열리고 사라지기 때문에 도착한 게이트를 열기위해 따로 절차가 필요한것은 아니였다. 때문에 팀장이 리셋버튼을 누른 이유는 소년의 온몸을 휘감고 눈과 귀를 막고있는 제어장치 즉 CI 를 제거해주기위해서였다.
CI(control installation : 제어장치) 가 제거된것을 확인한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저한 비공개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이곳에서 국정원 소속 팀장이 할수있는 일은 여기까지였기때문이다. 산속 깊숙히 외진곳에 위치한 정신이상자들을 위한 정신병원. 국가는 이곳 B 동에 작은 공간하나를 마련해 원인을 알수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그들을 격리시켜두었다. 여러검사와 약간의 실험이 이루어진다고 알려져있을뿐 정확한 실험의 내용은 국정원 (NIS :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에도 공개되지않았다. 임무를 마친 팀장은 현장에 대한 보고를 위해 정신병원 6층에 위치한 통제실을 빠져나와 다시 헬기에 올랐다.
그 시각 팀장이 나간것을 확인한 통제실 직원이 건물전체의 보안장치를 작동시키고 모든 입출구를 폐쇄했다. 그리고 곧 좁은 통제실 뒤쪽에 걸려져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 을 바라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NES ‥] 입밖으로 작게 읊조리던 직원의 손가락이 그림의 정 가운데에 위치한 인자한 얼굴의 예수로 향했고 손가락이 닿자 귀에 거슬리지않을정도의 낮은 궹음이 깔리며 벽면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NES (National experiment structure). 희귀성 바이러스 사태의 진압을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만들어졌다는 국가실험기구의 약자였다. 이곳의 명칭을 아는 사람은 이곳을 만든사람과 소속된 2명의 의사, 세 명의 연구원 그리고 다양한 직급을 가진 10명의 직원들뿐이였다. 모두 각 분야에서 최고의 두뇌를 자랑하는 인재들로 그들이 하는 일은 철저히 비밀로 진행되었으며 그 목적과 결과 역시 공개되지않았다. 벽면이 열리고 드러난 NES 의 본부는 곧 있을 실험준비로 부산스러웠고 진지함이 묻어나는 연구원들의 표정엔 약간의 흥미로움과 기대감이 서려있었다. 이제 곧 첫번째 실험이자 그들을 위한 게임이 시작될예정이였다.
D - 29:59..58...57
연구원 중 하나가 실험실을 빠져나와 통제실 책상위에 올려진 버튼하나를 눌렀고 그들이 모여있는 하얀 벽면에 홀로그램처럼 숫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56..55..54 정확히 29분 54초.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소년의 등장에도 익숙하다는듯 아무런 표정변화가 없던 그들이 의미를 알수없는 숫자의 등장에 처음으로 동요하기시작했다.
[...저게뭐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모두의 시선이 벽면에 펼쳐진 숫자로 향했지만 선뜻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없었다. 이곳에 누군가가 갇힌지 사흘의 시간이 흘렀지만 오른쪽 벽면아래 작은 입구로 제공되는 식사로 시간을 가늠할뿐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왜 이곳에 와있는지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두 명쯤 있을지도 모르지, 그게 누구인지 그 사실을 아는 이는 본인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겠지만.
"와우~"
몇몇의 감염자들이 숫자를 바라보며 머리를 굴리고있을때 누군가가 소년의 곁으로 다가와 들뜬 목소리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잠깐이였지만 무중력상태에 놓여있던 소년의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고 천천히 눈을 뜬 소년의 눈 앞에 장난끼가득한 익살스런 웃음을 짓고있는 남자가 보였다. 한쪽눈을 살짝 가리우는 검은 머릿칼과 자신과 시선을 마주한 깊은 눈, 장난스런 웃음과 낮은 저음의 목소리. 소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세워 주위를 둘러보았다. 쇄골이 보일듯 넥라인이 둥글게 파여진 하얀색 셔츠와 숫자.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있었지만 서로 다른 숫자가 세겨져있었다. 소년은 서둘러 자신의 모습을 살피기 시작했다. NO.2212 - 이것이 자신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숫자였다. 분명 무대의상을 갈아입지않은체 이곳으로 오게되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
"양요섭. 맞지?"
양요섭. 그랬다. 이곳에 오기 바로직전까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가수 양요섭.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였다. 요섭은 남자의 가슴에 새겨진 숫자를 바라보았다. NO.2208 이름이라던가 이니셜같은건 없는지 살폈지만 이 숫자뿐 아무것도 적혀있지않았다. 요섭은 다시 고개를 들어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묻고싶은것도 알아야할것들도 너무도 많은데 쉽게 입이 떨어지지가않았다. 아니, 그보다 두려웠다. 자신의 가까이에서 금방이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것같은 이 남자를 자신이 또 죽게만들까봐. 요섭은 눈을 질끈감고 몸을 웅크린체 떨기시작했다. 요섭의 눈 앞에서 타들어갔던 소녀와 요원의 모습이 다시금 기억났기때문이였다.
[떨려..?] 자신의 눈앞에서 떨고있는 요섭이 안쓰러웠는지 남자는 손을 뻗어 천천히 요섭의 어깨에 가져다대었다. 미세하게 남자의 손가락이 요섭의 어깨에 닿는 순간 요섭은 몸서리치며 남자에게서 멀어졌다. 죽게할수없었다. 더이상 자신때문에 누군가가 죽는것을 볼수가없었다.
"..죽기싫으면 가까이오지마."
경고처럼 들리겠지만 부탁에 가까운 애원이였다. 그 사람들의 죽음의 원인이 진정 자신때문이라면 그것이 끔찍한 악몽이아니라 현실인거라면 다정하게 자신을 바라봐주는 이 남자를 죽게 할수는 없었다. 남자는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작은 입으로 어울리지도않는 험악한 말을 내뱉는 요섭을 안쓰러움과 부드러움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신에게서 멀어져 벽에 기대어 주저앉은 소년에게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악..!] 요섭이 내뱉는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남자는 요섭을 꽈악 끌어안았다. 요섭은 두 눈을 질끈감고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었다. 간절하게 애원했음에도 자신을 끌어안은 이 남자는 곧 타서 없어질테니까. 요섭은 감은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자신땜에 누군가가 죽어가는것을 보지않을수있다면 눈이 먼다해도 좋을것같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토닥토닥 - 따스한 손길이 요섭의 등을 어루만지고있었다. 요섭은 천천히 눈을 떴다. 죽을거라 생각했던 자신을 꼬옥 끌어안은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선 자신의 머리를 감싸쥔체 떨고있었던거였다. 죽지않았다. 따뜻하게 자신을 감싸안은 이 사람이 살아‥ 있었다.
"바이러스‥ 끔찍하지? 누군가가 죽은 모양이야. 그지?"
"............."
토닥토닥 -
"괜찮아... 괜찮아, 봐 - 난 멀쩡하잖아."
토닥이던 손길이 요섭의 머리를 향하고 곧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따뜻한 손길과 자신을 감싸안은 온기,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밀려들어 요섭의 볼을 타고 왈칵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어린 아이를 달래듯 남자는 더욱 세게 요섭을 끌어안으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죽는다고해도 가까이가고싶었을거야. 실제로보니까 너 디게 예쁘거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건지 가늠조차할수없는 요섭에게 낯선 남자의 속삭임은 들리지않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듯 토닥임을 멈추지않은체 남자가 웃음지었다. [ 용준형. 사실 여기선 계속 비밀로 하고싶었는데 넌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서‥.] 겨우겨우 자신의 품에 안겨 훌쩍거리는 작은 소년의 울음이 멈추어질무렵 준형이 이제서야 생각났다는듯 요섭의 귀에대고 속삭였다. 용준형 ‥ 요섭이 작게 읊조리고 그 소리에 안은 자세를 풀고 준형이 요섭을 바라보았다. 작은 얼굴에 통통하게 오른 볼살도 새까만 동공이 자리잡은 동그란 눈도 읊조리는 목소리도 꽤나 귀여웠다. 이곳에 온지 이틀째- 이유를 알수없는 무료한 시간에 귀여운 장난감 하나가 생긴것마냥 기분이 좋아 준형은 다시 한번 작게 웃음지었다.
"..저기 ..여긴 어디인지.. 저 사람들은 왜 .."
궁금한것들도 알아야할것들도 너무나 많으니 무엇부터 물어야할지 생각이 잘 나지않았다. 일단 생각이 나는대로 요섭이 준형에게 물어오는데 준형 역시 딱히 설명해줄것들이 없었다. 자신이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요섭처럼 누군가를 죽여서는 아니였고 이곳에 온것도 오늘로써 이틀째이니 얻어낸 정보라곤 여기에 있는 사람들역시 이곳에 왜 왔는지 어디인지 알지못한다는것, 그러나 모두들 각자의 사연이 있다는것 뿐이였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건 우리는 이곳을 나갈수없다는 잔혹한 진실이겠지만.
"음..그러니까 여기는 ‥"
무엇이라도 설명을 해주어야겠다싶어 준형이 요섭을 향해 입을 떼는데 어디선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뷔시의 '월광' - 좁은 공간에 드뷔시의 '월광' 이 울려퍼지고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란 그들이 일제히 벽면에 숫자를 바라보았다. D - 00:05s ..4...3.. 3초가 남아있었다. 눈 앞에 작은 소년에게 홀려 잠시 상황을 잊고있었다. 도대체 저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거지? 준형이 생각을 다 마치기도전 시간은 흐르고 남아있는 시간은 단 1초였다.
팟 - 시간이 모두 지나자 벽면에 펼쳐졌던 홀로그램이 사라졌다. 음악은 서서히 그 소리가 커졌고 시끄러운 클럽에 있는것처럼 서로의 소리가 음악에 묻히기시작했다. 그러기를 몇 초가 지났을까. 서서히 좁은 공간을 밝혀주던 불빛이 희미해지고 그들이 머무르는 공간이 어둠에 가까워지고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그들이 주위를 둘러보던 그 순간 벽면 가득 새로운 홀로그램이 등장했다.
즐거운 게임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첫번째 게임의 주제는 liar 입니다.
룰은 간단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liar 를 찾아내는것.
제한 시간은 10분.
단서는 자신을 제외한 모두 입니다.
여러분이 게임을 클리어했을때 여러분이 궁금해하실것들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알게될겁니다.
그럼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
D - 09:59s
첫번째 게임이 시작되었다.
* STRANGER 시즌1 번외로 작성되었던 윤두준*양요섭의 이야기 [ 양꼬마의 유리구두 ] 가 이어집니다.
[STRANGER 번외 첫번째 이야기 '양꼬마의 유리구두' ]
w.하루(hearthm)
창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이 유난히 기분좋은 아침이였다. 얼마전 새로달아놓은 푸른커튼이 산뜻한 바람에 날리고 볼에 닿는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한 자락의 바람에 요섭이 꿀같은 단잠에서 깨어나고있었다. 꿈뻑꿈뻑 - 벌써 몇번이나 눈을 떳다감았다를 반복하고있지만 눈 앞에 있는 광경을 요섭은 믿을수가없다는듯 깜빡임을 멈추지않았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뜨고나서야 꿈이 아니라 현실임이 실감이나 요섭의 입가로 웃음이 세어나왔다.
새근새근 햇살이 창을 비집고들어오는 아침이 온줄도 모르고 아이마냥 잠에 푹 빠져 침대에 반쯤 얼굴을 묻고있는 두준이 요섭의 눈 앞에 있었다. 요섭은 두준의 옆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찬찬히 두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반듯한 이마도 오똑한 콧날도 지난 밤 자신을 끝없이 탐하던 저 입술도 - 어제까지도 이렇게 같이 잠들고 같이 눈을떴는데 어쩐지 오늘은 새삼스럽게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뻥좀보태서 수천번은 더 훔쳐본것같은 두준의 얼굴도 오늘따라 유난히 잘생겨보이는 요섭이였다. 그러다 문득 이것도 병인가싶어 두준을 바라보던 시선에 불안과 걱정이 묻어나긴했지만 요섭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해보니 참 다행스러운 병이였다. 이 병에 걸린체로라면 영원히 양요섭 눈에는 윤두준이 젤루 멋있을테니까 -
으쌰 - 요섭은 힘차게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자다 곰도 때려잡을정도로 고약한 잠버릇의 소유자 두준의 허리에 걸쳐있는 이불을 끌어다가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그러다 문득 드러나있는 두준의 맨살에 화악 얼굴이 붉어지며 어젯밤 부끄부끄므훗했던 광경들이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떠오르는 기억을 감당하지못하고 요섭은 으흠, 흠흠, 헛기침을 두어번하곤 찬물로 세수를 하기위해 빠르게 욕실로 달려갔다. 이러면 열이 좀 식으려나?
어푸어푸 열번도 더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것만 같은데 도저히 달아오른 볼이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아서 요섭이 울상을 짓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홍당무가 친구하자고 달려들것같았지만 이러면안되지싶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대로라면 부끄러워서 두준의 얼굴을 못볼것만같았기떄문이다. 안돼안돼! 당당해질꺼야!! 주먹을 불끈쥐고 입을 앙다물고선 요섭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욕실 문을 박차고 냉장고로 향했다.
'쪽'
달콤한 향이 두준의 콧가에 멤돌다 곧 굳게 다물어진 두준의 입술에 닿았다. 냉장고에 넣어둔 생크림을 입술에 잔뜩 바른 요섭의 달달한 아침인사에 두준은 작게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입술에 묻은 생크림에 반사적으로 혀로 낼름 입술을 핧고 혀에 감도는 달콤함에 두준의 시선이 눈 앞에서 베시시 웃고있는 요섭의 입술로 향했다. 하얀크림이 예쁘게도 묻어있구나 - 라는 생각이 두준의 뇌를 스치고지나가던순간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요섭의 머리칼을 두어번 헤집다 그대로 끌어당겨 두준은 요섭의 입술을 부드럽게 핧기시작했다. 혀에 닿는 달콤함이 마약처럼 스며들어 두준은 더욱 더 깊이 요섭의 입술을 탐했다.
맞닿은 입술로 서로를 더욱 깊이 탐하면 탐할수록 자신의 몸보다 큰 두준의 셔츠를 입고있는 요섭의 셔츠자락으로 두준의 손이 향했다. 몇개 잠궈져있지않은 단추가 두준의 손에 의해 거의 다 풀어질때쯤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두준이 요섭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었다. 키스에 취해 현실을 망각한 요섭이 두준의 갑작스러운행동에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두준이 콩 하고 자신의 머리를 두어번 때리고선 고개를 푹 숙인다. 잊고있었다. 어젯 밤 얼마나 아팠을지 상상은 가지않지만 꽤나 아팠는지 자신의 밑에서 신음소리를 내뱉던 요섭의 모습이, 꿈같았던 어젯밤의 역사적인 일들이 전부 다 기억나버렸다.
그런데도 자신이 이 발정난 손으로 요섭의 셔츠를 풀어헤치고있었다니 도저히 변태같은 자신을 용서할수가없어 두준은 요섭을 바라볼수가 없었다. 더욱더 깊이 고개를 푹 숙이는 두준이 자신처럼 부끄러워서 그런가보다싶어 요섭은 손을 들어 두준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주고선 천천히 두준에게로 다가가 두준을 끌어안았다. 요섭의 심장에 얼굴을 묻은 두준이 뛰고있는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있을때 요섭의 배에서 작게 꼬르르륵 하고 밥시계가 울려퍼졌고 그 소리에 쿡 하고 작게 웃음짓는 두준이였다.
"배고파..힝"
".....미안해."
"웅? 뭐가아~!!! 여보 나한테 뭐 잘못했옹?!"
"..나도 어쩔수없는 남자인가봐..."
"...???"
"..아침부터..더..더..덮..칠려고..."
"풋 ..."
배고프다는 자신의 말에 뜬금없이 미안하다길래 무슨말하나했더니 너무도 귀여워서 깨물어주고싶은 두준의 한 마디에 웃음이 터져버린 요섭이였다. 자신은 지금 세상누구보다 진지하고 미안한마음에 고개도 못들겠는데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요섭이 이해가 안가 두준이 요섭에게 안긴체로 고개를 떨구는데 요섭이 두준을 더욱 더 꽉 끌어안으면서 고개를 숙여 두준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두번, 세번, 아니 백번도 좋아. 윤두준과 함께하는거 양요섭한테는 천국이야."
*
여보가 좋아하는 삼겹살을 먹자며 요섭이 재료를 가지러 나가고 두준은 침대에 걸터앉아 사라지는 요섭의 뒷 모습을 바라보고있었다. 저 모습이 영원히 사라지게될까봐 무서웠었다. 자신을 배신하고 원래 요섭이 있었던곳으로 돌아가겠다고할까봐, 자신의 손으로 요섭을 겨누어야하는 순간이 오게될까봐 너무도 불안해서 미칠것만같았었다. 언제나 웃어주던 저 얼굴을, 윤두준을 윤두준답지못하게하는 예쁜 저 아이를 사랑할수있어서 다행이라고 두준은 멀어져가는 요섭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으며 믿지도 않았던 신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러니 부디 신이 있다면 제발 죽는 그 순간까지 함께할수있게해달라고 태어나 처음으로 간절하게 두준은 기도했다.
반쯤 열려친 창을 활짝 열고 두준이 바닥에 어지러진 물건들을 주섬주섬 정리하는데 침대아래에 낯선물건이 자리잡고있는것이 보였다. 두준이 손을 넣어 주심스럽게 꺼내어보니 낯선물건은 살짝 바레진 노랑빛을띈 작은 상자였다. 상자를 손에 들고 침대에 걸터앉아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보는데 사탕이나 초코렛이 담겨있을것만같은 예쁜 상자안에는 의외의 물건이 들어있었다. 두준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듯이 상자안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상자안에 들어있는 물건은 바로 회색빛이 감도는 작은 권총, 그리고 손바닥만한 카드였다.
두준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카드를 꺼내어들어 펼쳤다. 혹시 모를 외부의 침입을 비롯해 총이 의미하는 온갖 좋지않은 추측을 하면서 펼친 카드에는 전혀 의외의 물건만큼이나 의외의 내용이 담겨져있었다. 카드를 읽어내려가던 두준의 눈이 작게 떨리우고 두준은 카드를 다시 접어 상자안에 넣고선 닫혀진 상자를 손에 들고 요섭이 있을 텃밭으로 향했다. 그제서야 기억이났다. 요섭이 해주었던 그 말의 의미가 -
*
"상추야 잘 있었오?! 울 여보가 삼겹살 덕후라서 여기오자마자 내가 너부터 심었는데 그 사이 무럭무럭 자라났구나! 헤헤 어? 깻잎!! 아냐 너 잊어서그런가아니얌!! 지금 너테 인사하려고했다니깐~?! 깻잎도 잘 있었찌?? 드디어 오늘 너희들이 세상에 태어나 할수있는 가장 거룩한 일을 해야할 날이 왔어! 이쁘게 따줄게♥"
두준이 삼겹살을 좋아한다는말에 요섭은 텃밭에 온갖 쌈재료들을 심어두고 식탁에 올려놓을 이 순간을 위해 구슬땀을 흘려가며 물주고 애정주고 정성가득쏟아 키우고있었다. 바로 오늘이 땀과 노력의 결실을 맺을날이라 잔뜩 흥분한 말투로 쌈재료들에게 고루고루 인사를 하는 요섭이 연신 헤헤거리며 조심조심 상추를 따서 바구니에 담고있는데 서서히 눈 앞으로 그림자가 생겨나기시작했다. 분명 아침이였는데 비가오려나싶어 요섭이 고갤들어 하늘을 보려는데 요섭의 시야가득 하늘보다 더 눈부신 두준이 보였다.
"여보!!!!!!"
반가운 마음에 큰 소리로 두준을 향해 사랑을 담뿍담은 애칭을 날리는데 밝은 표정의 요섭과는 달리 어쩐지 표정이 어두워보이는 두준이였다. 혹시라도 무슨일이 생긴건가싶어 요섭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두준을 바라보다 작게 '무슨일있어?'라고 물었고 요섭의 물음에 두준은 유리구두이야기를 기억하냐며 반문했다.
두준을 속이고있다는 미안함과 죄책감에 짓눌릴때 요섭이 두준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였다. 새엄마와 언니들에게 복수하고 잘먹고잘살기위해 최고권위자인 왕자를 이용했다는 신데렐라이야기. 왕자를 배신하고 이용하긴했지만 왕자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는 그 이야기 - 요섭이 잊었을리가없었다. 두준을 속이고있던 요섭이 자신의 마음을 두준에게 전할수있었던 자신의 진심을 담은 이야기였으니까. 요섭은 두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두준을 바라보았다. 이제와서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걸까. 문득 두려운마음이 들어 요섭의 눈가에 맺혀버린 눈물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것만같았다.
"양요섭의 유리구두..주인한테 돌려주려고."
언젠가 요섭이 두준에게서 사라지게되면 그때 열어보라고했던 작은상자 - 의미를 알수없어 두준은 상자를 다시 침대아래에 넣어두고선 잊고있었다. 요섭은 떠나지않았고 그것을 다시 떠올릴일따위는 아마 없었을지도모른다. 하지만 다시 발견했고 두준은 결국 상자안에 들어있던 양요섭의 유리구두를 발견했다. 요섭이 남기려고했었던 마지막 메세지와 함께. 자신이 두준에게 주었던 상자를 두준이 자신에게 내밀자 요섭은 당황한듯한 얼굴로 어찌할바를몰라 선뜻 받지도못한체 두준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무슨 의미였는지 두준은 모르는것일까.
양요섭의 유리구두는 '심장' 이였다. 요섭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에는 [당신에게 나의 심장을 줄게요. 내가 당신을 배신하고 사라지면 내 심장을 가지세요. 내가 어디에있든 당신을 향해서만 뛰고있는 이 심장의 주인은 윤두준이니까.] 라고 쓰여있었다. 어떤 마음으로 요섭이 자신을 지키기위해 늘 항상 지니고있었던 권총이 담긴 상자를 두준에게 주었는지 두준은 모르는것일까. 이제와서 왜 다시 요섭에게 돌려주는것인지 혹시 그 이유가 조직을 배신한 국정원 소속요원 양요섭을 향한 배신감때문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요섭의 눈빛이 흔들리고 입술이 메말라가는것만 같았다.
"...양요섭 심장에 총 겨누는거 못해, 난 .. 총알이 양요섭의 심장을 관통하는건 내 심장을 관통하는거니까."
".........."
"이 총으로 혹시라도 내가 널 지킬수없는 상황이 오면 니가 니 심장을 지켜. 그래야 내 심장도 살아갈수있으니까."
두준이 요섭에게 반하고 요섭이 두준에게 반했듯 서로의 심장도 서로에게 반한걸까. 요섭의 심장이 멈춤은 곧 두준의 심장이 멈추는것과 같았다. 상자에 담긴 총은 스스로의 목숨을 걸만큼 자신을 사랑하는 요섭의 마음이였음을 알고있었기에 두준은 더욱 돌려줄수밖에없었다. 사랑하니까. 사랑하고있으니까. 두준역시 자신의 목숨보다 더 요섭을 사랑하고있었으니까. 요섭을 지켜주고싶었다. 살아서 조금 더 오랫동안 함깨하고싶었다. 이제 막 알아가기시작한 기분좋은 감정들을 조금 더 오랫동안 나누고싶었다. 이런 두준의 마음이 요섭의 마음에 닿아서였을까. 요섭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입가로 예쁘게 웃음이 그려졌다.
"...꼭 살아남을게. 살아남아서 윤두준 심장도 내가 지킬게."
상자를 받아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요섭이 나즈막히 내뱉은 말에 두준이 살포시 요섭을 끌어안았다. 품에 들어오는 작고 조그만 이 아이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천국에 있는것처럼 꿈을 꾸게만들고 그 꿈에취해 하늘에 둥둥 떠있는것마냥 기분좋은 환상에 젖어들게만들어주었다. 떙그란 눈으로 베시시 웃으며 두준의 머리를 헤집고 두준의 마음에 들어와 집을 짓고 들어앉아서는 나갈 생각을 하지않았다. 그러다 어느순간 맹랑한 이 꼬마아이가 윤두준 심장의 단 하나뿐인 주인이 되었다. 서로가 서로의 심장이 되어버린 두 사람. 요섭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풀어 조심스럽게 요섭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두준 그리고 두준의 심장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대고서 심장의 울림을 느끼는 요섭.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이 조금씩 조금씩 더욱 깊어져가고있었다.
[STRANGER 번외 첫번째 이야기 '양꼬마의 유리구두' Fin.]
w.하루(hearthm)